트럼프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형을 알코올중독으로 일찍 보내고 나서 술을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나의 아빠를 포함, 혈연으로 연결된 내 주변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는 준 알코올 중독자가 여럿 있다. 지금 언뜻 생각해 보아도 선명하게 4명이 떠오른다.
맥주를 기분 좋게 마시면서 글을 쓰는 그런 일은 나의 인생에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맥주 한잔을 마신 사람의 글처럼 말랑 말랑하던데, 나의 글은 아마 애써 정신을 차리려는 사람처럼 딱딱할 지도 모르겠다. 뭐 어쩔 수 없다. “한두 잔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아니다. 난 중독의 씨앗을 품고 있다.
트럼프는 술 대신 콜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위에 빨간 버튼이 있어서 이 버튼을 누르면 콜라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저 정도면 그냥 술을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트럼프가 술대신 콜라를 택했다면, 나는 술대신 책을 택했다.
책에 중독되었다.
이 말은 꽤 모범적인 사람의 건전한 취미처럼, 그리고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멋진 케이스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음.. 글쎄. 책과 콜라를 저울질해보니 책이 월등히 우월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고백하건대, 나는 경증의 난독증이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읽거나 쓰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질환이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한 바닥의 글을 읽으면 친구들은 다음페이지로 또 다음페이지로 넘어갈 때, 나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또다시 한번 읽어야만 내용이 겨우 이해되었다. 난독증이 유전이라는 뉴스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의 아빠는 아주 짧은 글 (이를 테면. 티브이 뉴스 자막으로 나오는 ’ 오늘 제주 기온 최저 11도, 최고 온도 13도, 예년 기온과 비슷해.) 마저도 꼭 소리를 내서 입으로 읽는다. 오늘의 아빠 탓은 여기까지.
책을 읽고 있으면 언제나 덜 초라해진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노숙자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 아이들이 뛰노는 공원 벤치에 누더기 옷에 해진 신발을 신고 저기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조금은 신경 쓰이던 차에, 할아버지가 가방에서 김수영 시집을 꺼내 읽었다. 방금 전까지는 거지 할아버지 였는데, 일순간에 ‘세상을 모두 해탈한 도인’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지희라는 못된 계집애의 주동으로 왕따를 당할 때,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이 모두 심화반 수업을 가고 덩그러니 혼자 남았을 때, 고등학교 성적에 끼워 맞춰 겨우 들어간 지방대에서 4년을 버티고 버틸 때, 유학 가서 만난 외국친구들이 주말이면 명품 쇼핑을 하러 가고 혼자 기숙사에 남았을 때, 대학원까지 마치고 고작 집에서 아기만 키우는 엄마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책을 꺼냈다. 그러면 내가 조금은 덜 초라하게 느껴지니까.
비교적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책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소설책은 고작 다섯 권 남짓이다. 그마저도 모두 단편소설이다. 단편은 어떻게든 읽는데, 장편은 끝가지 읽어본 적이 없다. 중간쯤 지나면 앞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브레이크와 엑셀을 같이 밟은 자동차처럼 애써봐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마 난독증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다만 추측해 본다.
내 독서인생에 2022년 1월 5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나 혼자만의 기념일로 만들어 평생 기념하고 싶다.
오디오 북을 만난 날이다.
눈으로 결코 읽지 못했던 작품들을 귀로 듣게 된 날이다. 눈으로 읽히지 않던 작품이, 귀로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는 너무나 놀라운 일인데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다. 온천지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했는데, 먹는 법을 몰라서 평생을 눈에 음식을 집어넣다가, 비로소 36년 만에 이 음식을 입에 들여놓은 기분이랄까. 소는 입으로 여물을 질겅질겅 씹어서 영양분을 얻고, 식물은 뿌리로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정보를 흡수하는 신체 기관이 다른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정보 흡수 기관은 눈이 아닌 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