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울에 버티는 기분(문화)
훈의 말수가 줄었다. 줄어든 말수처럼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아귀힘도 풀렸다. 느슨한 채로 맞잡은 손이라는 게 느껴진다. 언제라도 연대를 놓아버릴 듯한 이 감각은 옳지 못하다. 뭔가 틀어진 게 분명하다. 훈은 맞닿은 손으로 묵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더 참지 못하고 훈이 말을 꺼낸다.
- 베이비는 왜 나를 존중해주지 않아요?
- @_@?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훈을 올려다본다. 훈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무척 살뜰하게, 나보다 더 그를 살피던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했으므로, 이런 막말이 또 어디 있냐며 따지고 싶으나 훈이 말을 막는다. 이어 말한다.
- 내가 아까부터 그 브랜드에 가자고 했잖아요. 왜 내 이야기는 안 들어 주세요? 베이비 하고 싶은 것만 해요? 왜 내 말은 존중해 주지 않죠?
내 방식대로 훈을 존중하고 있던 나는 퍽 작가답게, ‘존중’이라는 단어를 잘근잘근 씹어 본다. 존중이란 무엇일까.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아니었던가. 훈을 존중하지 않던 적 없던 나는 입에 벌이 들어온 것마냥 다물지 못하고, 무엇을 말 할 것처럼 그러나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 훈의 얼굴이 붉다. 나는 버퍼링 하듯 쇼핑몰에서 있었던 일 모두를 복기해 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몸통에 옷 대여섯 벌을 대어본 것밖에 나는 한 일이 없다. 그것 밖에, 그와 그가 입을 옷 생각뿐이 하지 않았다.
*
그날은 쇼핑몰에 간 날이었다. 훈이 입을 맨투맨 티셔츠를 사기 위해서였다. 평소라면 한사코 마다했겠지만, 그날만큼은 훈도 그러자고 했다. 봐둔 브랜드가 있다며 거기 티셔츠를 입고 싶다고도 했다. 그렇게 훈이 선호하는 브랜드가 입점 된 그 쇼핑몰로 향했다. 몰 5층에 위치한 그 매장을 가기 위해 우리는 2층과 3층에 위치한 여성 의류 매장을 지나쳐야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참기름 냄새를 맡은 손참새는 2층부터 3층을 샅샅이 훑고 싶었지만 간신히 지나쳐갔다. 훈의 옷을 사러 온 것이므로 사리사욕은 참아 넘겼다.
작년에 유행 스타일과 비슷하지만 결코 똑같지 않은 옷들이 브랜드마다 걸려 있었다. 어떤 옷은 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내 남자가 입었으면 하는 지극히 내 취향의 상의를 볼 때마다 훈에게 들이대었다. 두 매장 걸러 하나쯤, 재봉선 위치만 달라진 듯한 맨투맨들을 지나쳤다.
- 자기야 이거 어때? 이건?
- 괜찮은데, 내가 가고 싶은 브랜드부터 가는 게 어때요?
-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옷가지를 뒤적인다)
그러다 훈의 말수가 줄고, 맞잡은 손이 풀어진 것이었다.
존중받지 못했다는 게 훈의 말이었다.
*
버터링을 멈추고 자리에 서 훈에게 설명했다. 쇼핑몰 한 복판에 훈과 내가 서 있다.
- 내가 자기야 위해 옷 고르고 있었잖아요.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보여준 거잖아요. 내 옷도 보지 않았어요. 자기를 위해서 여기에 왔어요. 천천히 둘러보다가 그 가게엔 나중에 갈 수도 있잖아요.
- 아니요. 나는 아까부터 베이비한테 그 브랜드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베이비는 듣지 않았어요. 계속 구경만 했어요. 내 말을 무시했어요. 나를 존중하지 않았어요.
훈의 말이 맞아서, 그러니까 귀를 덮어버린 게 맞아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시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입만 벌린 채 무어라고 말을 할 듯,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존중이 아닐 줄 몰랐으므로. 방어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서로 생각하는 ‘존중’이라는 단어의 뜻이 달랐음을 그때는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일로 서운해 했다. 나는 훈을 존중하던 내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 거 같아서, 훈은 자기피력을 무시당해서, 한편 존중받지 못해서. 어긋난 존중이었다.
결국 쇼핑을 포기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말을 잃었다. 뻐끔뻐끔 뜬 눈으로 버스를 스치는 사람과 건물과 서울의 빛 따위를 바라보며 눈물이 날 거도 같았다. 무엇이 존중일까. 왜 우리는 사랑으로 행한 일들에 어긋날까. 당연했던 것들에 오류가 생기고 침대에 누워 감은 눈으로 한참을 고민하다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모르는데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되었다.
- 베이비 나 알 것 같아요. 무엇이 존중인지. 내 방식이 존중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을 위하는 마음이 내 행동의 전제라면 전부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베이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진짜 존중이 무언지 이제 알 것만 같아요. 내 목소리만 높이지 않는 거요. 희생이나 배려라는 전제로 당신의 목소리를 덮지 않는 거요.
당신이 바란 존중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