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튀르키예는 한국과 많이 닮은 나라에요. 너무 아름다웠어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따뜻했어요. 그런 눈빛 너무 오랜만에 봐요. 어디서도 받지 못할 진심이었어요. 번역기로 나 한 마디, 너 한 마디 주거니 받으며 대화해야 했지만 그들 마음만은 알 수 있었어요. 쌤이랑 훈씨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얼마 전 애정하는 동생 아인이 튀르키예로 여행을 다녀왔다. 작년 시댁에 다녀온 뒤 보고 느낀 많은 것을 나누었는데 아인을 자극한 게 분명하다. 이스탄불이며 시댁이 있는 안탈리아, 카파도키아 등에 다녀온 아인이 보내 온 메시지였다. 덩어리 진 채로 온 무수한 여행사진과 말들이 아직 여흥이 남은 듯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아인의 말들이 고스란히 내게 스몄다. 꼰 다리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보냈던 튀르키예가 눈앞에 영사 된다. 작년 여름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는 아인이 한 말을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인정(人情)의 나라다.
거기 지내는 동안 나는 온 튀르키예인의 사랑과 환대를 받았다. 사랑과 환대의 예는 이러하다. 한국에서 훈이 아내인 내가 온다는 소식에 동네 주민이 시댁 거실로 모여 주었다. 소파에 앉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굳어있으니, 어려워하지 말라며 다들 따스히 미소 지었다. 물론 아인이 보았던 그 눈빛과 하루에도 수번은 만났다.
서울에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그 시간을 벌이에 쓰느라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가 보통인데, 튀르키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꺼이 시간 내어 주었고 아무도, 아무도 바쁘다며 나중에 시간 날 때 보자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본 튀르키예의 대접상이다.
개중 사업으로 몹시 바쁘던 친척 형 에크렘은 일을 미뤄가며 모스크와 역사박물관에 데려가 주기도 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고 필요한 건 없는지 분 단위로 물어보는 까닭에 때로는 미안할 정도로, 환대가 과분하게도 느껴졌다. 내게 온 정을 퍼 날라주었다. 그때는 마치 난로처럼 따뜻해서 곁에 오래오래 있고 싶은 기분이었달까. 그래서 훈의 작은 이모와 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노을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모는 뜨개질을 했고 나는 멍하기 하늘만 바라보았는데 서울에서 닳은 마음이 차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동네 전체가 한 식구 같던 나 어릴 때 한국과 닮은 것 같았다. 20년이 지난 지금과는 몹시 다른, 종종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훈이 이따금 ‘Strange(이상해)’하고 말하는 한국 문화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도 개중 하나다. 여기 물들어 버린 나는 혼밥혼술에 익숙하고, 옆집 사정 또한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훈에겐 이 모두가 낯설다. 실제 우리는 같은 건물 같은 층 이웃의 존재를 모르고 1년 6개월이나 살았다. 웃고 사는지 울고 사는지 알지 못했고, 어쩌다 커플이 거주한다는 정도는 알았는데 취약한 방음시설 때문에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매번 택배로 신선란과 2l들이 생수 6개씩 사 먹는 다는 것만 문 밖으로 알 뿐이었다.
인사할 기회가 있기는 했다. 마치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나 동시적이라 피하는 게 더 이상한, 잠시 얼어붙었던 그 상황에 304호 커플과 우리 부부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4명만 타도 꽉 차는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인사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야 말았다. 훈 덕에 나도 이 모두가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 현대적 한국이 아주 무인정(無人情) 사회만은 아닌 듯하다. 튀르키예와 닮은 구석은 선명하게 남아 지속된다. 하루는 훈과 나란히 전철에 앉아 집에 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곁눈질로 훈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꼭 그 쪽으로 돌아봐주기를 바라듯 분명한 시선으로 훈을 보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야 할까, 불편해지려던 찰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 이거 가래떡인데 조금 전에 시장가서 사온 거야. 따뜻하니까 먹어. 안 먹을 거면 냉동실에 넣어놓고.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 왔데?
외국에서 온 친구들만 봐도 눈물부터 그렁그렁해 진다는 엄마가 떠올랐다. 튀르키예요. 하고 대답하니 할머니는 가래떡 맛있을 거라며 말랑말랑할 때 먹으란다. 마다하려는데 또 엄마가 생각났다. 그러다 무작정 가래떡만 들이미는 할머니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타국에 와서 지내기 녹녹치 않겠구나, 고향이 가족이 그립겠구나.
나에게도 그런 가족이 있어. 지금 한국에는 없지만.
너를 보는데 그 애 생각이 나.
타국에 있는 그 애 생각이.’
더 묻지 않고 검은 봉지에 담긴 가래떡을 받아 왔다. 그도 딱히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엄마 눈에서 떨어지려던 그 물과 비슷한 농도일 거라고 마음으로 이해했다. 어서 가라는 듯한 손짓으로 안녕히 가라고 할머니가 손 흔들어 주었다. 집에 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을 잠시 바꾸어 주었는데 훈이 말했다.
- 엄마, 언제와요? 보고싶어요. 얼른 오세요.
어쩌면 우리가 잘 맞았던 것은 배알 깊숙이 자리한 정(精)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훈을 만나며 외로워 본 적 없고, 그것은 정녕 내가 훈을 사랑함에 보내는 페로몬과 같은 것이 되돌아 왔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러나 가끔 훈은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놈의 혼술과 혼밥에 익숙해진 현대적 서울인간 나 때문에. 바쁘고 바쁘다 하루를 마감하는, 곁에 있어도 늘 머리로 책을 쓰는 나 때문에.
하나 확신하는 건 초코파이 정(精) 문화가 있는 한 우리 사랑은 어느 일방의 지침 없이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