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친절한 그랜트
"아악~“ 남편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카톡 알림이 울린다.
남편이 우리 가족 카톡방에 보내온 항공권 발행 확인서이다.
”이상하다. 시작하자마자 들어갔는데 자리가 왜 없지? “
확인해 보니 우리 가족 넷은 행으로 나란히가 아닌 일렬로 쪼로로 앉게 되었다.
3-4-3 배열에 37B, 38B, 39B, 40B 그것도 왼쪽 3 열중 가운데 낀 자리 일렬로 쪼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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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는 날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바꿔보자.
안되면 인근 다른 사람들하고 바꿔보자.
그것도 안되면 우리 뒷자리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누워갈 수 있으니 그냥 가자며 최대한 희망회로를 돌려보았다.
사실 우리 남편은 여행 좌석운이 좋은 편이다.
호주로 올 때 비행기 좌석도 남편 혼자 가족과 떨어져 앉게 되었는데 마지막까지 창가 쪽과 가운데 좌석에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10시간 편안하게 누워 왔다.
도착하기 2시간 남겨놓고 나에게
“누워서 편히 잘래?” 물어보길래 눈으로 심하게 욕을 해주었다.
‘쳇! 처음부터 바꿔줄 것이지!!!‘
갈 때도 좌석운을 기대하며 떠나는 날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다.
데스크 직원들이 확인해 보더니 도저히 좌석변경이 안된다는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온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쪼로로 편히 뒤로 누워 가기로 하고 올 때 10시간 편히 누워 온 신장 183cm 남편에게 기꺼이 우리 좌석 중 맨 뒷자리를 양보하였다.
좌석을 안내받아 자리에 앉았는데 역시나 만석이었다.
‘이런 인기 좋은 호주 같으니라구!
아니 인기 좋은 코리아인가?’
갑자기 피지컬 좋은 외쿡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모두들 파란색 후드 티셔츠를 유니폼으로 입고 키는 하나같이 천장에 닿을듯하다.
가슴박에 작은 글씨로 뭔가 쓰여있다.
노안이 와서 눈을 비비며 자세히 보니
‘SYDNEY FC’ 축구선수들이었다.
요즘 운동선수들 왜 이렇게도 잘생긴 건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난감하다.
멀리서 봐도 큰 그들이 온다.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더니 멈춰 섰다.
창문 쪽 내 옆자리가 얼핏 보기에도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구척장신 축구선수자리이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내 옆에 선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인상 좋은 웃음을 만면에 지으며 큰소리로 인사한다.
“안녀하쎄요?”
‘어라~’
어떻게 리액션을 지어야 할지 너무 놀라 멍하니 눈만 껌벅껌벅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안면에 마비가 올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을 유지하며
‘너 축구선수니?’ 물었다.
그때부터 스몰토크가 시작된다.
말이 스몰이지 빅토크이다.
내 오른쪽 좌석에 앉은 여자분이 이름을 물었다.
갑자기 한글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준다.
어디서 배운 건지 필체가 나보다 곱고 예쁘다.
“한국말 쪼꼼 해요”
한마디 하고는 빅토크댐의 수문이 열려버렸다.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소개를 해서 호구조사가 끝나버렸다.
내가 들은 게 맞다면...
이름 그랜트 현 시드니 fc소속이고, 전 포항 스틸러스 수비수이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하여 전북 경기장을 가야 하는데 잔디 문제로 수원 근처 용인경기장에서 전북현대와 1차전을 치른다고 했다. https://naver.me/xv3fNaHj
'우와~ 알아들은 거 맞냐??? 린이 칭찬해~'
“수원? 용인? 엇 거기 나 살던 곳인데 나 잘 알아~”
라고 하니 거기 날씨는 어떤지 이런저런 질문이 또 쏟아진다.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라 라라라~
질문은 쏟아지지만 나의 대답은 언제나 의도와 다르게
'날씨 굿~ 장소 굿~ '단답형이다.
엄청 과묵한 코리안 아줌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듣고 보니 그랜트가 먼저 한국말로 인사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3년이나 한국에 살았다니...... 한국을 꽤 그리워하는 듯했다.
한국은 1년 전에 떠났고 한국 살면서 비 시즌 동안 강남, 이태원 같은 곳으로 여행 다녔다고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 사냐고 묻는다.
‘어랏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 말해놓고
이제 내 호구조사하는 거야?’
김포에 산다고 하니 너무 잘 안다고 강화 가는 길에 있다고 한다.
포항에서 서울 올 때 김포공항으로 온 거냐고 물으니 그랜트는 KTX를 타고 왔단다.
나보다 구석구석 한국을 더 많이 누비고 다닌 듯하다.
나에게 호주는 처음인지 느낌은 어땠는지 날씨는 좋았는지 등을 물어봤고
‘얘 나한테 궁금한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길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말수 적은 샤이한 코리안아줌마가 되었다.
“아~~ 사실 나는 최강 수다워먼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블라블라 많이 물어볼까 봐 말도 못 걸겠다.
세계인의 자식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듯하다.
그랜트는 포항에서의 3년 생활을 얘기하며 4살 큰아들과 2살 작은아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큰아들은 심지어 한국에서 태어났단다.
한국에서 어린이집에 다니던 큰아들 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을 하는데 전형적인 서양 꼬마아이가 한국 아이들 틈에서 학습지를 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영어회화공부 좀 더 해놓을걸... 영어 공부를 너무 오래 쉬었네.
린아 뭐 하고 있었던 게야!!!’
그랜트 얘도 수다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는 ‘혼자 왔냐? 가족은 어디 있냐?’ 또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가족과 함께 앉고 싶으면 자리를 바꿔 준다는 제안도 잊지 않았다. 역시 친절한 그랜트 씨
바로 뒤에 딸이 있다고 하니 딸이 원하면 바꿔준다고 한다.
딸의 양옆도 축구선수라 딸은 벌써 한 시간째 어깨 깡패들 속에서 차렷자세다.
마음은 쭉 토크하며 같이 가고 싶지만 벌써 위에서 경련이 오며 불편한 게 가방에 고이 쌓서 보내버린 비상약통 속 진경제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10시간 비행 편하게 가려면 토크보다는 편안함을 택해야 하는 이내마음 그랜트는 모를 것이다.
첫 번째 식사도 흘깃 보니 비빔밥을 고추장 듬뿍 참기름까지 넣어 야무지게 비벼 먹더니
두 번째 나오는 식사도 치킨스튜를 먹는 양옆에 선수들과는 달리 오징어 덮밥을 맛있게도 먹는다.
‘그랜트 한식을 격하게 사랑하는구나?’
그랜트와 딸이 자리를 바꾸고 스몰토크든 빅토크든 못한마음이 못내 아쉬웠다.
그랜트가 딸과 자리를 바꿔주어 나는 의자의 등받이를 90도 각도를 유지하며 잠을 청해야만 했고, 190이 넘는 그랜트가 움직일 때마다 안마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떨림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야만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잠을 청했는데 얕은 잠 속에서 끊임없이 그랜트랑 얘기하는 꿈을 꿨다.
그리고는 깨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 안 바꿨음 내가 잘 수나 있었을까 싶었다.
불이 꺼져서 시드니 fc선수들도 대부분 자고 있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잔다. 시드니 fc 유니폼색이 파란색이다 보니 거대한 스머프들 같다. 혼자 피식 웃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나는 조금 많이 지쳐있었다. 하여 굳이 쉼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여행보다는 잠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었다. 큰 기대 없이 다녀온 여행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다 컸어도 함께 있다면 엄마의 손과 마음이 갈 것이고 이제 나는 나만 챙기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솔직히 말해 나 외에 남에게 쓸 마음의 여유공간이 지금은 없었다. 오랜만에 가는 가족과의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에서 나만 남던지 나만 떠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역시 여행은 알 수 없는 미지세계가 펼쳐지고 새로운 만남과 일들이 기다려서 떠나 볼 만하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선 그 진가를 다 알기에는 역부족이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직접경험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간접경험을 함으로써 비슷하게 접근할 순 있지만 100%다 안다고 하는 건 억지일 것이다.
한국말도 잘하고 심지어 한글도 쓸 줄 아는
나이스한 그랜트.
바로 옆에 붙어 앉아 떨리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랜트에게 사진을 찍자고 요청한다.
‘그랜트 유명한 선수였구나. 축구 아무것도 모르는 아줌마의 시답지 않은 반응으로 실망한 건 아닐는지...’
나도 용기를 내어 같이 한 장 부탁하니 활짝 웃어주는 미소천사 그랜트
나는 “나잇수 미츄, 굿 럭~”을 말하고
총총총 빨리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