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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Sep 02. 2023

세상에 영원한 것도 있다.

골든 리트리버. '맹인 안내견'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개 품종이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역이 원산지이고 맑은 눈과 함께 은은하게 귀티가 흐르는 인상의 대형견이다. 이름 대로 윤기가 흐르는 금빛 또는 크림빛의 풍성한 털이 가장 큰 특징이다. 대형견 중에서도 귀공자스러운 분위기의 골든 리트리버를 키우는 것이 로망이었다. 공원에 누워 책을 읽는 내 옆에서 리트리버가 엎드려 눈 감고 낮잠을 자고 있는 씬을 자주 상상했다. 도심에서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큰 개와 산책하는 차도녀 같은 내 모습이 꿈에 나오기도 했다.


나의 로망은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로망이라며.” 주어도 목적어 도 없이 던져진 한 마디와 함께 친구가 내민 작은 생명체. 태어난 지 3개월쯤 된 아기 골든 리트리버였다. “털 색깔이 왜 이래? 유부초밥 색깔이네. 눈도 신동엽처럼 몰려있어. 이마와 머리는 왜 이렇게 일자야? 귀도 작은데? 골든 리트리버 맞아??” 파닥거리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기뻐 폴짝 뛰기보다는 정말 리트리버가 맞는지 추궁하는 질문을 쏟아냈다. 황금빛 털과 큰 귀, 적당히 갈라진 이마 그리고 턱이 좁고 길어 비교적 날렵한 주둥이가 내가 아는 리트리버의 일반적인 외모였다. 알고 보니 금빛 외에 크림 빛도 있었고 귀의 크기나 기타 생김새는 사람 얼굴이 모두 다르듯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대형견 골든 리트리버 ‘유부’를 만났다.



티 없이 맑은 갈색 눈동자 위에 짙은 쌍꺼풀. 그 아래 길게 뻗은 크림색 속눈썹과 살짝 풀린 파마머리처럼 자연스러운 털의 웨이브가 유부의 시그니처다. 평소에 공같이 둥글한 정수리는 간식을 주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어느새 곧게 일자로 변해있다. 가뜩이나 작은 귀는 주인을 반길 때 한껏 젖혀져 아예 보이지 않는다. 웃을 때면 새하얀 이가 하나도 빠짐 없이 보이는 데다 귀에 닿을 정도로 벌어진 큰 입에 선홍빛 혓바닥까지 도드라진다. 작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발바닥은 어찌나 귀여운 지. 그 발에 코를 박고 킁킁 아가 냄새를 맡곤 했다.


며칠 전 내 발 밑에 누워있던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녀석은 6살이 되었고 평균 수명의 반 정도를 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여움으로 무장했던 강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지나온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새치가 생기거나 흰머리가 나는 것처럼 영국 귀공자 같았던 선명한 크림색은 물 빠진 것 마냥 옅다. 게다가 피부 질환으로 턱 밑은 새까매졌고 잘 관리해 주지 못한 탓에 치아는 누래졌다. 오동통 둥그래 아가 아가 했던 발은 가냘폈고 발바닥에서는 지독한 고린내 난다. '소'라고 착각할 만큼 맑았던 눈망울이 점점 탁해지는게 제일 마음에 걸린다. 개도 나이가 들면 노안이 오고 눈이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마구 부딪힌다. 체내 조직이 약해져 머리를 세게 치면 눈알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유부도 나를 본다. 녀석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깨에 들쳐 업거나 가방에 쏘옥 넣어 전국 방방곡곡 함께 여행하던 날들을 기억이나 할까? 아이가 태어난 뒤로 여행 갈 때면 호텔에 맡겨지는 기분은 마냥 슬프기만 하려나. 어쩌다 아이와 셋이 집을 나서면 “도대체 날 두고 어디 가는거야? 빨리 올 거지?”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슬픈 눈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이와 놀고 있을 때 그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며 만져달라고 하는데 모질게 비키라고 소리만 친 건 아닌지. 아이와 눈 맞추며 시간을 보낼 때 속절없이 내 뒤통수만 보고 있던 건 아닌지. 어느새 달라진 유부의 외모처럼 아이를 핑계로 개를 대하는 나의 마음도 변했구나 싶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라고들 한다. 6년하고도 3개월 24일째. 녀석은 한결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나를 따르고 반긴다. 주인을 향한 개의 마음, 세상에 영원한 것 하나쯤은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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