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들 열일 중
“빨리해. 시간 얼마 안 남은 거 보이지? 저번처럼 셔틀버스 놓치면 엄마가 못 데려다줘. 엄마도 회사 가야 해. 빨리해” 구글 타이머를 가리키며 아이를 재촉한다. “아이 참. 엄마 알았어. 알았다고!” 잔뜩 심술이 난 아이가 소리친다. 친정엄마가 애 조바심 나게 어디서 저런 걸 사 왔냐며 타이머를 갖다 버리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걸까? 빨리 준비하라고 했을 뿐인데 아이의 심술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아빠 자니까 조용히 말해.” 또 한 번 다그친다. 어른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과를 앙 베어 문다. 양말을 신고 외투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으면서도 아이가 말 한마디 없다. 단단히 뿔이 났다. 중문을 세게 열더니 쾅 하고 나가 버린다. 이것 봐라.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디서 문을 그렇게 세게 닫으래? 누구한테 배웠어? 어?” 그냥 넘어가도 될 법한데 나도 참 만만치 않은 엄마다. 아이는 등을 진 채 조용히 엘리베이터만 바라보고 있다. 5살 딸의 삐침이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아이의 뒤태가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후후. 행여나 내 웃음소리가 들릴까봐 입을 틀어 막고 최대한 시크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탄다. 버스에 타서도 고개를 획 돌리고 인사하지 않는 아이. 평소 같으면 버스 창문에 대고 손 하트 다발 총을 날리고 윙크를 남발할 텐데……애써 엄마의 눈길을 피한 아이의 옆모습에 계속 웃음이 난다.
그렇게 아침을 보내고 퇴근 후, 신발을 벗으며 딸과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대뜸 내 목덜미를 잡고 귀에 속삭인다. “엄마 아침에 내가 화내서 미안해”. 아이고 이놈 보소. 웃음부터 터진다. 딸 애교에 녹아내린 달까. “이제 얼른 양치하자.” 평소 같으면 더 논다고 생떼를 피울 텐데 콧노래를 크게 흥얼거리며 싹싹하게 대답한다. “응. 알았어 엄마아” 하고는 룰루랄라 양치를 한다. 양치를 끝내고 수건으로 야무지게 입 주변도 톡톡 닦아내면서도 여전히 흥얼거린다. 콧노래를 끝내고 동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3분이나 되는 노래 가사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부른다. 숨 한 번 쉬지 않고 침 한 번 삼키지 않고 엉덩이까지 실룩실룩거린다. 아이의 목소리와 잔망스러운 율동에 빠져 한참 넋을 놓고 보는데 남편도 동참한다. 어느새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서로 빵 터져 배를 잡고 웃어댄다. 엄마 아빠를 보고 멋쩍었는지 혀를 쏙 내밀고 부끄러워하는 아이 모습은 보너스다.
깔깔 웃어대는 남편과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자가 있다. 우리 집 골든 리트리버, 유부. 거실 구석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총총 걸어오더니만 모든 관심이 딸에게 쏟아지는 걸 느꼈는지 우리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댄다. 꼬리에 크게 반응하지 않으면 “히융히융” 끙끙 소리를 내며 애처로운 눈빛을 마구 발사한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나 좀 어떻게 해줘 봐. 만져라도 줘봐”라고 말 하듯이 동물의 오디오와 몸짓을 동시에 사용하며 안달이 난다. 급기야 허벅지에 가만히 놓인 내 손을 입으로 툭툭 쳐올린다. 만지란다. 한 번 만지고 말면 계속 친다. 두어 번 만져주다 귀찮아진다. “아, 그만해. 소파!” 아쉬운 눈빛을 하고 뒷걸음질 치고 가는 척만 한다. “소~파!” 하니 자다 일어난 사자처럼 어슬렁어슬렁 겨우 소파로 이동한다. 자기 소파에 앉아 우리 가족을 관망하다가 슬그머니 다시 온다. 딸과 나란히 앉아 있는데 그 사이를 파고들어 40kg 육박하는 몸을 비집어 넣는다. 개 나이 8살이면 중년이라던데 갈수록 애정을 갈구하는 개도 사람과 다르지 않구나. 덩치는 말할 것도 없고 머리도 참 큰 우리 집 개가 들이대면 딸만큼이나 귀엽기 그지없다. 유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씩 웃고 있었는지 남편이 왜 웃냐고 묻는다. 메마른 나의 웃음 건수 중에 그래도 9할은 우리 집 5살 딸과 중년 대형견 유부. 내 새끼들뿐이다. (1할은 남편 몫으로 일단 남겨둔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