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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바다 Nov 06. 2024

오늘 그 대가를 치렀다

연지동 일기35

독감 주사를 맞기 위해 보건소에 갔다.

보건소에 간 김에 혈액순환제를 처방받았다.

복권 판매소에 가서 만 원어치 복권을 샀다.

그 앞에 있는 약국에 가서 처방전으로 혈액순환제를 구입했다.

집에 왔다.


이튿날, 시니어클럽에 출근했는데 갑자기 어제 구입한 약봉지가 궁금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약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다.

약국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부터 기억나지 않았다.

시니어클럽에서 일을 마치고 이발소에 들렀다가 서둘러 집에 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비닐봉지가 있을만한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비닐봉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있어야 할 약상자에도 없었고 서재 책상에도 식탁 위에도 없었다.

여러 번 반복해 찾아 헤맸지만 어디에도 비닐봉지는 없었다.

뿐만아니라 비닐봉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다.


불현듯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떤 사물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텅텅 비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설마 치매같은 건 아니겠지, 어정쩡한 불안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내도 비닐봉지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어제 방문했던 약국을 찾아갔다.

약사는 손님이 놓고 간 약은 없다고 했다. 

손님이 약국에 놓고 간 약은 따로 보관해 놓는다는 알리바이성 말도 덧붙였다.


다시 집으로 왔다.

이제 찾아봐야 할 마지막 남은 곳, 쓰레기통이다.

무의식 중에 쓰레기통에 물건을 버렸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탐험도 수포로 돌아갔다. 

쓰레기들을 헤치며 봉투를 찾았지만 결국 없었다.


이제 남은 일은?

무의식 중에 봉투를 놓쳤거나 차에서 내리며 흘려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차장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

혹시 약상자에 있는 건 아닐까.

어제 살폈을 때는 약상자에 없었는데...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내 최후의 생각은 맞았다.

처방받은 약들을 약상자에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약상자를 열어보고도 나는 약을 찾지 못했다.

내가 찾았던 건 약이 아니라 약을 싸고 있는 비닐봉지였던 것이다.

아마도 무의식 중에 약을 꺼내 잘 진열해 놓고 비닐 봉지는 버렸던 모양이다.

우습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고 여러 감정들이 섞인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에 나는 또 한번 나의 노화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몇 미터 더, 나는 노화의 길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살면서 자주 비닐 봉지에 집중하고 살았던 것 같다.

어떤 물건들을, 그 물건 자체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에 눈과 마음을 빼앗겼던 삶.

오늘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인생에세이#건망증#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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