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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g in Houston Aug 18. 2020

렛 잇 슬로우 인 휴스턴

한국 엄마 밤은 휴스턴 아빠의 낮보다 더 치열하다!


한국 시간에서 두 시간을 빼고, 낮과 밤을 바꾸면 휴스턴 시간이다. 한국시간으로 밤 9시, 그리고 휴스턴 시간으로는 아침 7시, 태어난 지 250일 쯤 된 아이가 휴스턴에 사는 아빠와 하루에 한번 영상통화를 한다. 굿나잇과 굿모닝을 서로 주고받으며 영상통화가 끝나면 아이는 꿈나라로, 아빠는 회사로 각자 출근을 한다. 가끔 휴스턴에 비가 많이 오거나 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잠들어버리면 그날 아빠는 아이를, 아이는 아빠를 볼 수 없다.


남편은 “어쩔 수 없지. 다이조브”라고 말하지만 엄마인 나는 안다이조브다. 어떻게 해서든 하루 한번은 아빠와 아이가 얼굴을 봐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래서 아이가 일찍 잘 것 같은 날은 휴스턴 시간으로 새벽에 전화해 자는 남편을 기어코 깨워 부자상봉을 주선했다. 휴스턴에 비가 많이 와서 집에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날은 남편을 일찍 회사로 출근시키는 악덕을 부리곤 했다. 나의 이런 횡포에 남편의 눈 밑에는 다크써클이 떠날 줄 몰랐지만 입은 항상 웃고 있었다. 반면 나는 하고 싶은 대로 다 요구했지만 입에서 한숨이 계속 나왔다.


내 직업은 프리랜서 북 에티터 겸 글 작가. 아이를 낳기 전날에도 원고를 쓰고 있었다. 양수가 터져 새벽에 병원을 가면서도 출산하러 가지만 원고는 보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조리원에서도 원고를 썼다. 산후조리가 중요하다는 말보다는 경력이 단절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컸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이 때문에” 라는 말은 절대 일하면서 하지 말아야지. 손목에 아대를 차고, 출산 전과 다름없이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일을 받아서 하고 있었다. 나를 닮은 분신 같은 아이를 낳았지만 반대로 이 아이 때문에 내가 없어질 것 같은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됐는데 일을 해도 되냐고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을 손에서 놓으면 산후 우울증에 시달릴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이미 산후우울증이 맞았다. 나는 일로 도망치고 있었다. 엄마라는 현실에서.

  

아이가 백일이 되도록 출산 전 날 원고를 보낸 출판사 담당자에게 연락이 없었다. 출산하고 나왔다고, 그 후 원고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낼 때 마다 회의가 있어서, 마감이라서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답문만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느낌에 출판사로 전화를 했더니... 세상에. 담당자는 내가 보낸 원고를 대용량 메일 다운로드 기간이 지나도록 읽지 않았다. 위에서 시킨 급한 원고가 있어서 깜박했노라고 변명했지만 여러 출판사를 다니며 북에디터로 일했던 나로서는 담당자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을의 자세로, 나도 출판사를 다녔고 마감 때 얼마나 바쁜지 이해 할 수 있다며 계약된 다음 원고 스케줄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5년차 담당자는 해맑게 이렇게 말했다.


“작가님, 출산하시고 바쁘실 거 같아서 작가님이 하시던 시리즈 다른 작가님께 의뢰 드렸구, 작가님은 다른 기획부터 잡아주셔서 하시면 되요. 우리 **앤 ** 캐릭터로 아무거나 기획해서 주세요.”


담당자는 결혼식을 앞둔 여자 북 에디터였다. 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저도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꼭 낳고 싶어요.” 했었다. 그러니 아마 경력이 더 차면 나처럼 프리랜서로 일을 하던지, 아니면 다른 선배들처럼 일을 접고 자신의 아이를 키우거나 작은 출판사로 이직해서 적은 급여지만 정시에 퇴근해서 아이를 찾으러가는 워킹맘을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에게 “출산을 핑계로” 계약서까지 쓴 내 프로젝트를 다른 작가에게 넘겼다. 총 5권짜리로 시리즈물 기획부터 3권까지 원고를 썼는데 이제 와서 다시 또 기획을 하라니. 그냥 신인 작가를 데리고 왔는데 기획이 힘드니 시리즈를 넘겨 줄 수 있냐고 물었다면 배려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출판사 다닐 때 경력 작가의 출간 스케줄이 빡빡하면 신인 작가에게 넘기던 일도 있었으니까. 대신 경력 작가에게 의논하고, 다른 시리즈 물을 더 계약해주면서 배려해 달라고 하던 지 아니면 경력 작가에게 마감을 당겨 줄 수 있냐고 물어야 하는 게 관례다. 그런데 그 담당자는 귀찮고 바쁘다는 핑계로 멋대로 일을 처리했다.
전화를 끊고 설마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명함만 가지고 있던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나... 그 담당자는 국장에게 작가가 출산을 해서 그 이후 바로 원고를 쓰기 힘들다고 했다며 다른 작가에게 일을 넘겨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임신성 당뇨였고, 아이는 예정일 보다 5주나 빨리 2.7kg로 세상에 나왔다. 임신성 당뇨 테스트를 하던 날도 갑자기 마감을 당겨달라는 출판사 전화에 밤을 새고 병원에 왔었다. 나는 임신하는 동안 태교는커녕 일만 했고, 덕분에 아이 배냇저고리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았다. 그 기억이 그 전화 통화를 하면서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평소라면 삼켰을 말을 국장과 통화를 끊고, 담당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아마 나처럼 프리랜서가 되던, 직장을 다니는 워킹 맘이 되던 살면서 아이를 핑계로 일할 때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그땐 내 생각이 날거예요. 그리고 그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되겠죠. **씨조차도 임신, 출산을 핑계로 차별했잖아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입덧을 하면서도, 낮잠이 쏟아져도, 다리가 퉁퉁 부어도, 내 이름을 걸고 마감과 원고 질을 지켰는데 나의 임신과 출산은 구실 좋은 핑계였다. 여중 여고를 나오고, 여자들이 많은 출판사를 다녔기에 남녀 차별은 살면서 당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여자인 담당자가 여자인 프리랜서 작가에게 임신 출산을 핑계로 계약한 일에 갑질을 날린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남편이 생기고, 출산을 해서 아이가 생겨도 나는 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산을 핑계로 이런 일을 당하다니 그것도 같은 여자에게. 나는 아이를 낳고 비로소 내가 사는 세상을 알았다. 그동안 차별을 받지 않은 것은 내가 차별 받는 자리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누구라도 그 자리에 가면 차별을 받는 사회였다. 하지만 누구 한사람의 잘못이기보다는 아직도 우리 모두가 서툴게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날 먼저 잠든 아이 대신 내가 남편과 영상통화를 했다. 사실 나는 남편이 주재원으로 휴스턴으로 떠난 뒤 공들여 고친 신혼집을 전세로 놓고, 친정살이를 시작하고 난 뒤 남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 얼굴이 좋은 날에는 “너 혼자 편히 휴스턴에서 사니깐 좋니?” 라는 분한 마음과, 반대로 얼굴이 퀭한 날에는 “그러니까 누가 거기까지 가서 그렇게 고생하래?” 라는 고까운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그래서 아이와 아빠는 영상통화를 꼭 시켰지만 나는 남편과 영상 통화는 자주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가 하는 영상통화는 사실 내가 생색을 부리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편 도움 없이도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서 아이를 잘 키우며 일도 하고 있다는 그런 생색 말이다.


사실 그 시간은 아이를 재워놓고 한참 원고를 쓸 시간이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아이를 시설에 보낼 수 없어 친정엄마에게 부탁해 외부 미팅을 다녀오는 날 외엔 아이는 내 차지였다. 그래서 늘 쪽잠을 자며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밤잠을 잘 때 글을 썼다. 그래서 시차도 문제였지만 남편과 여유롭게 통화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오랜만에 남편 얼굴도 보고 싶고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휴스턴에서 엘에이로 출장가려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남편에게 전화를 끊으며 하려던 말을 툭하고 흘렸다.


“돌잔치는 휴스턴에서 하자.”


“너 **앤 **마감 때문에 바쁘잖아. 잠깐 오게?”


“아니, 가서 살게.”


“뭐?”


“나 계약 파기했어. 엄마랑 같이 갈게!”


나는 등기로 받은 **앤 ** 시리즈 물 계약 파기 서류를 사진으로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은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즈니스 티켓을 끊은 PDF 파일을 보내주며 문자를 보냈다.


“그동안 수고했어. 장모님이랑 조심히 들어와.”            

  

남편에게 말하기 전까지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하기도 했었다. 화를 참고 할 말을 누르고 일을 했어야 했던 게 맞는 거였을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아직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우리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할 땐 이런 식의 핑계는 없는 사회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비즈니스를 끊었다는 말에 남편에겐 당연히 그래야줘야지 했지만 일 관두자니 당장 다음 달 카드 값이 두려웠다. 핸드폰을 뒤져 전 회사 동료에게 문자를 보냈다.


“출산 육아 특가로 고료 반값 할인, 나 일 좀 줘.”


그날은 오랜 거래처였던 ** 출판사를 떠나 다른 출판사와 새 계약을 맺은 날이기도 했지만 내 이름만 귀했던 내가 엄마라는 자리를 지키며 일하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하다. 다시 사회 초년생이 된 것처럼 두려웠지만 앞으로 하나씩 배워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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