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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g in Houston Nov 08. 2020

렛 잇 슬로우 인 휴스턴!

굿바이 코로나! 헬로 핼러윈 인 휴스턴! 3

아이는 말을 못 한다. 아직.


한국에 있을 때는 돌이 막 지날 무렵 “이게 뭐야?”라고 문장을 말해 날 감동시키더니... 2월에 미국에 오고 나서는 “엄마”,“아빠”도 못하고 소리만 지르고 다녔다. 마치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말이다.

2월에 휴스턴에 와서 어린이집을 다녔지만 코로나가 시작되어 3주 만에 어린이집이 문을 닫았다, 가기 싫다고 울며불며 적응만 하다가 어린이집 생활이 끝난 셈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와 함께 집에 있었다. 코로나가 막 시작될 무렵 나는 아직 한국에서 끝내고 오지 못한 원고 마감으로 밤낮없이 일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얼마나 못 하는지도 모른 채 아이는 늘 저렇게 천둥벌거숭이로 뛰어만 다는 줄 알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한국 조리원 동기와 카카오톡 음성 통화를 하다 “엄마,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태민이 배고파. 밥 줘!”라는 내 아이와 같은 달에 태어난 아이의 말을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말로 전할 수 있을 만큼 컸는데 우리 아이는 여전히 소리만 지르며 다녔다.   


공도 차고, 킥보드도 타고, 자전거도 타지 심지어 신체 발달은 상위 1%라면 우쭐해 있었다는 말이 맞았다. 말이야 곧 하겠지 했지만 가르치지 않고 그냥 얻어지는 건 없었다. 그동안 코로나라는 핑계로, 미국에 적응하고 나도 일한다는 핑계로 아이한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게  너무 미안해졌다.  

그제야 미리 사뒀던 단어 카드를 꺼내서 “이건 캔디야”,“이건 사과고”라고 해봤자 이미 몸으로만 노는 게 익숙한 아이는 카드를 던지고 밖으로 나가자고만 했다. 나가자고 우는 아이를 달래고, 혼내며 말을 가르치길 몇주... 아이는 단어 카드만 보면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결국, 아이는 오전에만 집 앞에 있는 사립 유치원을 가게 됐다. 집에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있기보단 유치원에 가서 다른 아이들과 있으면서 뭐라도 한자 배우길 바라는 마음에서 보냈지만 걱정이 됐다. 한국어도 못하는 애가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괜찮을까? 혹시나 백인 아이들에게 맞고 오는 건 아닐까?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길 일주일, 드디어 일이 터졌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를 차에 태우는데 외국인 선생님이 말했다. 엄청 빠른 속도, 격양된 목소리... 난 몇 번이나 다시 얘기해 달라는 말 끝에 겨우... 아이가  다른 아이를 물었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학칙을 소개하는 유인물과 경고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를 물때마다 경고장에 사인을 하고, 3번 이상이면... “정학”이다. 2주 동안 집에서 근신하다가 다시 학교를 갈 수 있고,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집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문 적이 없었는데 7개 월 만에 다시 시작된 단체 생활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또 경고장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 번만 더 물면 정학이다. 어린이집을 다닌 지 3주도 채 못 되어 아이는 반 아이들을 물고, 책 읽는 시간에 신발을 던지고 도망가는.... “문제아”가 되었다.


왜 우리 아이가 그럴까? 남편과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 아이도 영어가 낯설다는 거였다. 남편은 주재원으로 회사에서 영어로 일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나는 주부로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영어로 원하는 물건을 설명하고 사느라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 외국을 여행 가는 건 설레고 기쁜 일이지만 생활은 글쎄... 그런데 우리 아이도 우리처럼 낯선 언어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모국어인 한글도 입 밖에 잘 나오지 않는 아이인데... 하루 세 시간 동안 영어만 하는 낯선 곳에 있다오니 예민해질 수밖에...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무는 건 안돼를 아이 입에 손을 넣고, 물면 혼내길 반복해서 가르치고... 유치원을 갔다 오면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 “캔디”를 꺼내 줬다. 단걸 빨리 배우면 이도 상하고, 밥도 잘 안 먹는다는 말에 비타민 캔디도 3일에 하나 줄까 말까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기도하며 다짐했다. 한 번만 더 물면 그냥 한국 어린이 집이 문을 열기 전까진, 아무리 짐승처럼 집안을 뛰어다니고 말을 못 해도 데리고 있겠다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룸맘에게 메일을 받았다. 어린이집 선생님 생일 리스트와 생일 선물은 어떤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촌지에 예민한 나라로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는 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곤란한 일이지만 미국은 뭘 하든 “자본주의 나라”라는 말이 와 닿았다. 선생님의 생일선물이나 각종 기념일에 선물을 주는 게 당연하고, 반 문 앞에 받고 싶은 생일 선물 리스트를 적어 놓는 선생님도 있다고 했다. 학교를 위해 기부해 달라는 메일이 끊임없이 오고, 기부하는 금액에 따라 방과 후에 사설 놀이터에 놀 수 있는 시간도 달라진다고 했다. 이게 나쁘고, 좋다기보다는 여기는 여기의 문화구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른 주재원들의 말을 듣고 또 고민이 됐다. 과연 내가... 유학은커녕 한국에서 나고 자라 외국 여행도 잘 안 가 본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잘사는 사람들이 기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 기부금으로 재능 있는 아이들이 공부를 이어갈 수 있고 잘사는 사람들도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학교에 정당하게? 돈을 내고 들어가는 나라. 그래서 기부가 단발성의 어느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들의 다 선의가 아니라 생활인 나라이기도하다는 말에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문화다.


룸맘의 안내에 따라 선생님 선물로 돈을 모아 내겠다고 선택하고 남편은 메일 말미에 우리가 한국에서 와서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자 룸맘은 우릴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남편은 인종차별이 심한 이곳에서 백인이 얼굴도 못 본 동양인을 집으로 부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며 흥분했고, 나는... “그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학교에 메일을 보내는 것도 남편 몫이고, 그 자리에 가도 나의 번역기로 말을 할 사람도 남편이니... 남편이 가고 싶다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우스에 사는 미국인들은 뒷마당에 동물 사육하거나 화덕 혹은 바비큐 기계를 들여놓는다고. . . 말만 들었는데 실제로 룸맘네서 봤다.

룸맘의 아이는 모두 4명으로 모두 그 사립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하우스에 살며 뒷마당에 우리 집 차고만한 닭장을 짓고 닭을 키워, 닭이 알을 낳는 소리로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었다. 하얀 얼굴과 파란 눈의 금발머리를 가진 교과서적으로 우리가 아는 흔한 백인의 얼굴을 한 룸맘의 가족들은... 미국에서 만난 그 어떤 한국인들보다 친절했다.


뒷마당에 있는 화덕을 보고, 진짜 사용하는 거냐고 묻는 남편 말에 룸맘은 핼러윈 때 이 화덕에 피자를 구워 핼러윈 파티를 할 거라며 우리도 초대했다. 우리는 엉겁결에 그 자리에서 말했다. 아이 러브 잇... 떠오르는 영어 대답이 그것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미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핼러윈이 다가오고 있었다. 룸맘은 결혼하기 전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2년 동안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한국 사람들에게 받은 친절을 오늘 우리에게 갚은 거라는 아름다운 말에 뭔가 울컥하는 감동이 몰려왔다. 누군지 모르지만 십여 년 전 마산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룸맘에게 한국의 정을 베푼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룸맘에게 초대받고 난 뒤, 아이를 백인 학교에 보내는 게 좀 덜 무서워졌다. 어디든 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전히 내 귀에는 영어가 잘 들리지 않지만, 그리고 내 혀는  여전히 영어만 사용하려면 엉켜버리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은 끝까지 천천히 말하고 내 말을 들어줬다.  


학교에서 주최하는 핼러윈 행사도 가고, (코로나로 사전에 신청한 사람들만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야외 공간에서 입장했다. 3살 이상부터 마스크 사용은 필수였다.)



룸맘 집에서 하는 핼로윈 파티를 다녀왔다.

핼러윈 당일에는 아이를 데리고 돌며 트릭오얼트릿도 했다. 아이의 손을 양쪽에서 잡고 라이트 불을 비추며 어두운 밤길을 걷다 정말 무서운 분장을 한 아이를 만날 땐 정말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공포를 느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코로나로 학교 핼로윈 퍼레이드 행사에 부모는 참석할수 없었다. 대신  유투브 실시간 방송으로  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들어가지 못하고, 집 밖에 놓아둔 캔디 바구니에서 캔디를 얻어 왔지만 처음으로 미국에 와서 코로나 말고 다른 걸 즐길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일 좋았던 건...


우리 아이가 새로운 단어를 말했다는 거다. “캔디”

핼로윈 때문인 건지, 아니면 어린이집을 다녀올 때마다 캔디를 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캔디를 줄 때까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울고불고 그 어떤 괴물보다 무섭게 소리를 지르지만 아이가 새로운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아직은... 기쁘다.


우리 아이는 말을 못 한다. 여전히...


하지만 전보다 많이 불안하지는 않다. 다른 아이보다 느리고 또 한국인 부모 밑에서 미국에서 사느라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배워야 하는 핸디캡이 있지만 아이는 자기 식대로 앞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 앞에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없는 코로나가 있지만 어두운 밤 세 가족이 작은 손전등 하나로 어두운 길을 비추며 걸어갔듯 이 시기를 세 식구가 함께 이겨나가길!


굿바이 코로나! 헬로 핼러윈 인 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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