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났다기엔 믿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그중에 한 번은 서울로 막 올라왔을 때였다. 내가 재수학원 현관을 나서는데 코너를 돌아서 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중, 고등학교 동창인 J였다. 그 순간, 둘의 동공이 모두 확장됐다.
“뭐냐? 너 왜 여기 있어!”
“뭐냐 이건!”
나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서울에 올라간다는 걸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잠수 타듯이 갔던 서울행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모든 것이 새로운 타지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난다는 건 스무 살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저쪽에 아는 사람이 보여서 다가가 인사를 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부딪힐 뻔한 사람이 친구였던 것이다.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J는 말을 이어갔다.
“야 K도 여기 다닐 거래. 1주일 뒤에 서울로 올라올 듯”
그렇게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J, K와 같은 학원에서 재수생활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둘 중에 K와의 우연은 좀 질긴 편이다. 재수학원 이후에 같은 대학교로 진학한 것도 모자라서 회사까지 같은 곳으로 입사했기 때문이다. 20대의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와 직장을 모두 우연히 함께했다. 같은 회사에서 만나게 됐을 때는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마주침이 익숙한 기분까지 들었다. 한번 피식 웃게 될 뿐이었다.
또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은 이탈리아에서였다. 나는 2010년에 제대하자마자 3일 뒤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서유럽 4개국인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을 28일간 여행할 계획이었다. 첫 여행지 국가는 이탈리아였다. 나는 로마를 시작으로 피렌체를 거쳐 베네치아로 향했다. 21시 30분쯤에 베니스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는데 어깨가 치일 만큼의 인파로 북적였다.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세계 3대 불꽃축제 중에 하나인 레덴토레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설명을 빌리자면,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틀간 마시고 즐기는 여름철 가장 큰 축제이다. 이 축제는 매년 7월 셋째 주 토, 일요일에 개최되는데 1575년부터 1576년까지 유행했던 흑사병이 종식된 것을 감사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한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 인구의 30%인 4만 6000명이 죽었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나는 숙소로 가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어깨 뒤로 백팩을 메고, 어깨 앞으로는 DSLR을 목에 걸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프린트한 지도를 꺼내고 걷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구글 지도에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지만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온전히 지도에 의지해서 가야 했다.
베네치아는 골목의 연속이었다. 나는 골목이 주는 생소한 분위기에 DSLR 셔터를 눌렀다. 대부분 여행자의 마음이 그렇듯이, 창문에 걸려 있는 빨래마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골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한참 뒤에 깨달았다. 몸은 지쳤지만 짜증은 나지 않았다. 온몸에 15Kg 정도의 무게를 얹고 길을 잃어버려도 ‘이게 낭만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 같다.
약 1시간 정도 걸었을까. 나는 산마르코 광장 주변에 있는 한인민박에 도착했다. 7월의 지중해 열기 속에서 속보로 걸었으니 온 몸은 땀범벅이었다. 나는 샤워를 먼저 해야 했다. 숙소 사장님이 말했다.
“얼른 씻고 나오세요. 다른 손님들은 밖에서 맥주 파티하고 있어요. 오늘 맥주는 무료입니다!”
무료라니! 나는 무한정 들이 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직 군인 습관이 남아 있어서 약식으로 샤워를 마치고 사장님과 밖으로 나갔다.
먼저 온 투숙객들은 땅바닥에 원형을 그리면서 20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원형으로 다가갔다. 끼어 앉을자리를 찾고 있을 때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친구랑 비슷한 사람이 있는가 보다’하고 넘어갔다. ‘설마’라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여기는 유럽이 아닌가!
나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자리에 앉으면서 내 눈은 그 남자에게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 P였다. 나는 소리쳤다. 누구를 불렀다기보다는 외친 것에 가까웠다.
“야!!”
P는 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놈이 소리를 지르는 거야'라는 표정이었다. 잠시 긴가민가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다가 등을 젖히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나도 마찬가지로 너무 놀라서 이 말이 유럽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뭐냐 이건!!!"
지구는 6 대륙이라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 있었을까. 이탈리아의 베니스, 그것도 동일한 숙소에다가 같은 날짜를 숙박하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단체 카톡방에서 유럽을 갔다 온다고 얘기라고 했겠지만, 우리는 내가 군에 있는 동안에 연락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P가 나에게 물었다.
“야, 여기서 뭐해?”
“뭐하긴, 유럽여행 왔지!”
“너, 아직 군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탈영했어?”
“전역한 지, 10일 됐다.”
“야! 어이없네.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야! 일단 한잔 먹자. 앉아 앉아!”
우리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2년 간의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그리곤 할로겐 등이 비추는 거리에 앉아서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를 기다렸다. 바다 위에는 연인들이 타고 있는 곤돌라가 가득했다. 저기서 불꽃놀이를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밤 11시 30분.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그날은 기분은 취했는데 술은 취하지 않는 밤이었다.
우리는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지만 잠시 잊고 지내는 관계들이 있다. 서로는 각자의 일상을 보내다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다. 그럴 때, “어떻게 지내?”라며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다시 연락을 시작하기도 한다.
아니면, 어떤 이유로 인해 멀어져 버린 관계도 있다. 이런 경우의 마주침은 당황스러운 만남이 된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까지 이런 난감하고 괴로운 상황이 있진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