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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순 Jul 14. 2021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소중한 것들을 밀어내고 있다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소중한 것들을 밀어 낸다면.

 조직에 속하지 않은 불안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퇴사 직후 ‘내일은 뭐하면서 놀지?’라는 생각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한숨으로 바뀌었다. 생활 리듬은 빠르게 무너져갔고 집에는 술병이 쌓여 가고 있었다. 엉망이 되어 가는 집구석처럼 내 머리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는 항상 사회적으로 어딘가에 속해 있었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초, 중, 고등학교 그리고 1년간의 재수학원을 지나서 대학교에 입학했다. 운 좋게 졸업과 동시에 회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사원이라는 소속감이 주는 기쁨은 수많은 책임에 얽매어 있는 구속감으로 바뀌어 갔고 정해진 출퇴근 루프에서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지금은 회사에 구속되고 싶지 않다고 외쳤던 입은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어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생활의 리듬을 다시 찾아야 했다. 나는 자발적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규칙이 필요했다. 알바 사이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일 알바로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이 회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찾아가는 구내식당 콘셉트의 케이터링 회사였다. 구내식당이 없는 회사를 타겟으로 프리미엄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사업 기획이었다. 나는 판교에 위치한 한 회사에 배정되었고 매일 아침 10시 홍제에서 판교까지 지하철로 출근했다.


 알바를 구하는 데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지옥철 시간을 피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10cm 정도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 출퇴근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옆사람의 땀냄새나 맡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손발이 묶인 채 앞사람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싶진 않았다.


 반대로 공간이 넉넉한 지하철은 편안함을 주었다. 나는 항상 머리를 뒤로 기댈 수 있는 가장 구석자리에 앉았다. 지하철은 비교적 일정한 속도로 출발과 멈춤을 반복했다. 출발과 함께 점차 리듬이 빨라지는 덜거덕 덜거덕 소리는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지하철엔 에어컨의 냉기가 가득했고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 나오는 한 대화이다.

 “그래, 노인장이 정말 그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 아니오.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그분이 달링턴 가문으로부터 그 저택을 사셨거든요.”


 사실, 이 노인장은 영국의 달링턴 경 밑에서 집사로 35년을 일했다. 그는 저명한 가문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부심으로 최선을 다해 달링턴 경을 모셨고 집사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된다는 투철한 직업정신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적인 신사라고 믿었던 달링턴 경이 나치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평생을 모셨던 자신의 주인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던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달링턴 경의 몰락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과 평생을 바쳤던 시간의 무너짐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신뢰와 맹목적인 충성으로 살아온 35년은 그에게 커다란 배신을 안겨주었다. 우리가 열심히라고 말하는 성실함과 대상에 대한 성찰 없는 맹목성이 만났을 때 얼마만큼 공포스러울 수 있는지 알려주려는 듯 보였다.


 이 집사는 열심히 산 사람의 전형이었다.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젊은 날의 사랑도 잃어버린 채 집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대체 어떤 중요한 일이었기에 이 중요한 것들을 제쳐 두었던 걸까. 정작 아버지의 임종 때 그가 하고 있었던 일은 한 나리의 냄새나는 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을 뿐이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는 집사의 일을 버리지 못했다.


 지하철이 판교에 도착했다. 현대백화점을 지나 내가 출근하는 건물의 16층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점심시간 동안 고객을 응대하고 식기류들을 정리하면서 머릿속에선 수십 가지의 질문들이 오고 갔다. 나도 그처럼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몰두하고 있진 않는가? 반대로, 내가 맹목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매몰되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이 미뤄지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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