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초등학교가 주 1, 2회 등교수업을 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모두가 처음 겪는 혼란의 상황에서 초등교사는 더욱 공공의 적이 되어갑니다. 코로나 관련 뉴스마다 달리는 많은 댓글이 꿀 빠는 교사 이야기니 더 말해 무엇할까요. 방학 중에도 월급 꼬박꼬박 받고, 퇴직 후엔 연금 받으며, 잘릴 걱정도 없는데 퇴근까지 빠른 공무원. 교사들은 이미 미운털이 박힌 지 오래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대시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 그들은 왜 미움의 대상일까요? 소통의 기술을 말하기 전, 초등교사의 불친절한 이미지가 어디에서 왔는지 사실과 추측을 명확히 구분 짓고 접근해 보려 합니다. 시작부터 상대에게 불신과 적대만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소통법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부모는 제1의 인간을 만들고, 교육은 제2의 인간을 만든다’는 페스탈로치의 말처럼 부모와 교사는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공동운명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나의 초등 학교 선생님 ≠ 우리 아이 초등학교 선생님
몇 해 전 스승의 날, 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선생님께 들었던 최악의 말’이란 주제로 사연을 받아 소개하였지요. 방송 후, 게시판은 들끓었습니다. 교권 하락을 위한 방송, 하필 스승의 날 교사의 사기를 떨어뜨리다니. 빗발치는 항의에 결국, 다시 듣기는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만큼 교사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이 많은 거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죠.
잠시, 여러분도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을 떠올려 볼까요? 선생님 성함은 가물가물하고,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를 것도 같습니다. 물론 명암은 있기 마련이지만 놀랍게도 선명히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뭘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아직 어린애한테 그렇게까지”
“그런 사람도 교사라고”
좋았던 기억보다 아팠던 기억, 억울하고 상처로 남은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우리는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교사로부터 상처받은 이야기 한 보따리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죠.
‘옛날엔 다 그랬지 뭐.’ 그 말만으로는 씻어낼 수 없는 울분이 우리에겐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교육자이자 스승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엄격한 도덕적 잣대까지는 아니어도 표준 도덕적 잣대 옆에는 있었어야 할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준 ‘초등학교 선생님’ 이란 말만 들어도 묘하게 기분이 나빠집니다.
유치원도 오래 다니지 않았던 우리에게 초등학교란 처음 겪는 사회생활, 앞으로 겪어 갈 학교생활의 첫 단추였습니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경험한 초등학교의 경직되고 험악한 비도덕적인 행위는 더욱 충격으로 남았지요. 그때라고 존경받는 선생님, 친절한 선생님이 왜 없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충격으로 각인된 일부 교사에 대한 어두운 기억만 간직합니다.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촌지도, 차별도, 체벌도, 불성실한 수업 준비도 있기 어렵지요. 핸드폰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고, 국민신문고가 두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들은 똑똑해졌습니다. 교육대학교 커트라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특한 아이들과 고학력의 학부모에게 인정받지 않으면 그들을 가르치지도 설득하지도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존경심도 들지 않는 엉터리 교사의 훈계를 들으며 지시를 따르겠습니까? 선택할 수 있는 사교육 교사가 지천에 있는데 말이죠.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맞습니다.’ 하던 때가 아닙니다. 교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지요. 허투루 수업을 준비하고, 건성으로 아이들의 생활을 지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2. 하필 유치원 다음이다.
중·고등학교는 엄마가 사사건건 학교 일에 개입하고 간섭하면 아이가 싫어합니다. 엄마도 귀찮습니다. 지금까지의 학교생활을 통해 내 아이를 충분히 파악했기에 기대도 포기도 적당히 할 수 있습니다. 안되는 거, 못하는 거, 심지어 못된 점까지 압니다. 초등학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학년의 경우, 아이는 아직도 품어야 할 부모의 전부입니다. 속 썩이고 내 생각대로 안 커 줘도 아직 받아들일 수 없지요. 게다가 궁금한 거, 걱정되는 건 언제든지 상담해 주시던 유치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내가 깜빡하고 못 챙겨주면 선생님께 부탁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선생님에게는 그런 부탁 하면 안 된다네요. ‘초등교사는 뭐가 특별하다고?’, ‘같은 선생님인데 왜 유치원 선생님은 해준 걸 못 해주나?’, ‘다 핑계지 결국 귀찮아서지 않겠는가?’ 편히 돈 벌면서 귀찮은 건 또 안 하려고 하니, 불친절하게만 느껴집니다.
고학년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사춘기가 온 건지 심상찮은 변화에 부모는 늘 불안한데 전과 달리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방에 틀어박힙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를 물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죠. 화내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용건 없이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쉽지 않고요. 드디어 상담 주간이 오고, 아이의 문제행동과 관련된 교사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애가 이 정도인데 여태 뭐하다 이제 말해주나?’ 원망마저 듭니다. 때론 스스로 불안을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 ‘이맘때 아이들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지나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죠. 이래저래 흔들리는 사춘기 학부모 마음에, 초등 담임은 마침 필요했던 탓할 대상일지도 모릅니다.
3. 어느 집단에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성추행, 조작, 음주운전, 불륜. 매일 심심치 않게 접하는 씁쓸한 사회면 기사들이죠. 그런데 이 사건의 주체가 교사라면 어떨까요? 제자 성추행, 성적 조작, 교사 음주운전, 교사 불륜. 굳이 더하지 않아도 이미 자극적이고 분노가 치밉니다.
어떤 집단에서나 있어서는 안 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이야기들이 유독 교사에게는 엄격합니다. 사건 하나 터지면 모든 교사를 색안경을 끼고 보지요. 억울할 때도 있지만 교사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높은 수준의 도덕적 요구가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교육의 시작은 모델링(modelling)입니다. 학생에게 교사는 훌륭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것도 우리의 꿈나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초등교사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요.
“교사가 돼서는”
교사 같지 않은 그들이 들어 마땅한 소리입니다. 하지만 극소수의 부적응자의 일을 모든 교사로 확대하여 “교사들이 다 저렇지 뭐”라는 말로 사기를 꺾진 말아 주세요. 그래야 대다수의 온전한 교사들이 더욱 힘을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