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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민 Aug 10. 2021

영등포 05, 마을 버스 기사님


창문 너머 천둥소리가 들렸지만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며칠 전 우산을 잃어버렸던 터라 새것을 살 요량에 빈손으로 집을 나섰다. 멀리 떨어져 사는 친언니, M의 생일선물을 사러 나선 길이다. 그런데 아뿔싸, 두 정거장쯤을 남겨놓고 후두두두 굵은 빗방울이 버스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린다. 금세 차오른 빗물은 물보라를 일으킨다. 우리나라도 열대기후가 되려나 요즘은 스콜마냥 쏟아지는 비가 잦네 - 라는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이를 어쩌나 싶다. 내릴 정류장엔 지붕이 없다. 결국 버스 뒷문에서 우뚝 선 표지판을 지나 애견숍의 차양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 잠깐 사이 쫄딱 젖었다.




애기 엄마가 된 언니, M은 워킹맘이다. 일과 육아, 둘 중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무엇 하나 놓을 수 없으니 만만찮다. 아가가 아프기라도 한 날엔 회사에서 아쉬운 소리를 듣고 집에서는 아픈 아가와 자신을 대신해 고생하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 그들 사이를 오가며 애쓰는 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멋졌다. 손을 잡고 같이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언니는 어느새 어른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24시간 중  30분 만이라도 오롯이 '나이기만'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친 하루의 끝 혹은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 되길 바라며 고른 선물, 바디워시. 평소 브랜드에 딱히 관심이 없는 터라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정한 산타마리아노벨라, 시향을 하러 발길을 재촉했다. 비바람을 뚫고 왔건만 타임스퀘어에 매장이 없다. 더현대를 갔어야 했나. 잠시 멈춰 고민을 하다 냅다 샤넬로 향했다. 어디 한번 제대로 기분 내보자!



생일카드에 박스포장까지 야무지게 챙기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평소라면 단 세 정거장이면 도착인 시내버스를 이용할 테지만, 오락가락하는 빗방울에 집앞에 내리는 마을버스를 탔다. 영등포 05번. 안녕하세요 - 인사를 건네며 버스에 오르는데 나이 지긋하신 기사님의 표정이 여엉 편치 않다. 늦은 시간이라 피곤하실 만도! 여기며 자리를 찾아 앉으니 이내 버스가 출발한다.



" 너무 뒤에 정차하셨어요. 뒷문으로 내리는 승객들이 불편하기도 하고, 뒤에서 오는 차량 때문에 위험하거든요. "



꽤 큰 목소리가 버스 안을 울리니 저절로 눈길이 갔다. 맨 앞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가 기사님에게 말을 건넨다. 한 손에는 차트표가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 지도 앱이 켜져 있다.



" 지금은 2차선이 아니라 1차선으로 들어가셔야 해요."

" 뒤에 오는 차편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 돌아오면 쉬시겠어요? 아,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되세요. "



잠시 시선이 머무니 답이 나온다. 버스기사님은 교육을 받는 중이다. 젊은이는 버스 간격과 교통 정보에 빠삭한 듯 보였고, 기사님은 이제 코스를 익히고 낯선 정보들을 바삐 습득하는 모양이었다. 젊은이의 말투는 까칠하지 않았고 예의가 없지도 않았다. 안전을 위해 준수할 법규와 되려 편한 운행을 위한 팁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젊은이의 말에 그저 '네..네' 라고 답하는 기사님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왜 이리도 애잔할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일기장을 펼쳤다. 사랑니를 뽑아 이틀 만에 만난 쌀밥에 신이나 먹은 갈비덮밥, 포장을 열고 웃음 지을 언니의 표정을 상상하며 선물을 고른 설렘 - 모두 생략되었다. 일기의 첫 줄은 '영등포 05번 기사님'이었다. 보고 들었던 것들을 그대로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나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래서 결론이 뭔지, 적어야 하는데.. 형용할 수없이 일렁이는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지 몰라 애꿎은 펜만 붙잡고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덜그럭 덜그럭, 빨간불에 일시정지했던 바퀴는 이미 구르기 시작했는데 뜬금없이 앞문이 열렸다 닫힌다. 승객들을 무사히 내려주고 뒷문을 닫고 출발하려는데 또다시 눈치 없는 앞문이 덜커덩 덜커덩 열어젖혀졌다 황급히 닫힌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조작이 손에 익지 않아 벌어진 사태일 테다.



" 네..네 "



기사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힘없이 나부끼는 깃발마냥 고장 난 듯 자꾸만 덜그럭 덜그럭 열고 닫히기를 반복하던 앞문이 눈에 밟힌다. 덜커덩 소리가 기사님의 심장소리 같다. 긴장해서 튀어나온 실수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불규칙한 쿵쾅거림.



그는 못해도 20년은 사회생활을 한 베테랑일 것이다. 나이만큼 켜켜이 쌓인 경험이 그의 안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그 세월을 살아낸 내공은 젊은 세대의 것과 비교가 불가할 것이다. 그런 그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 버스 안을 스윽 훑었다. 내 또래는 없었다. 나는 주제넘게도 이 버스 안에 그의 자녀로 짐작되는 이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어젯밤, 끝내 일기장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저 눈앞이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영등포 05번의 앞문처럼 불규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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