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전태일과 화해하고 싶다》 < 2 >
나는 인사담당 과장으로서 이러한 회사의 성장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병역특례요원들의 선발과 배치 업무는 나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나는 직접 전국 기계공고, 공고, 직업훈련원은 물론, 공대, 공전 등을 찾아다니며 우수한 인재들을 발굴했다. 그들을 회사 기숙사에 입주시키고 일정 기간 교육을 거쳐 현업 부서에 배치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10대 후반부터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풋풋하고 순진한 젊은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선배이자 형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땀과 열정이 모여 회사의 발전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노동 운동의 파도와 나의 상흔
우리 대일중공업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 어수선하던 1980년부터 이미 많은 노사분규를 겪고 있었다. 창원, 마산, 부산, 울산, 거제 등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았는데, 우리 회사는 그중에서도 단연 중심에 있었다. 당시의 분규는 단순한 임금 인상이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학생들까지 합세한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창원 마산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산업 현장이 그랬다.
그 중심에는 강태우 (당시 노조위원장)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 무렵, 전태일의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이라는 일기장 속 글을 읽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될 결심을 했던듯하다. 대졸 학력을 숨긴 채 영등포 직업훈련소에서 선반 자격증을 따 위장 취업한 그는, 대일중공업 노조를 장악했다. 나는 그를 보며 전태일에게까지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강태우를 비롯한 그들 중 누군가가 쓴 720쪽짜리 ‘끝나지 않은 저항’(1985~2015년 사이 대일중공업 노조운동 30년사)이라는 책에는 그들의 투쟁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대일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조운동의 뿌리다, 방위산업체 최초로 파업을 벌였다,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탄생시켰다, 1985년 임금인상 투쟁에서 파업 농성을 전개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과 구로동맹 파업과 더불어 9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전주곡으로 평가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단순히 임금 인상이 아닌,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적 발자취로 평가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들의 기록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그저 '투쟁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직원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노조 집행부의 선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대자보를 써 붙였고, 확성기를 통해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나는 몇 차례 그들의 대자보에 ‘회사 측 어용 인사’, ‘노동자 탄압의 주범’이라며 이름이 올랐다.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무거웠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해야 했다.
그들은 시위 때면 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아~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꽃다운 이내 청춘’. 애절한 가사나 선율이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들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하도 들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지기도 했다. 요즈음 내가 나가는 교회 찬양대에서 가끔 그 노래 가사를 고쳐 부른다. 그때마다 다 아는 곡이지만 나는 악몽이 되살아나 입이 열리지 않는다.
시위대 집행부는 현수막, 리본, 머리띠 등에 적힌 구호 문구, 바탕색이나 글체, 글자색, 민첩한 행동 등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공안 당국의 지침대로 따라야 하는 회사는 속수무책일 뿐, 노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우리는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도, 동시에 노조의 격렬한 시위에 대응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내가 직접 전국 기계공고 등을 다니며 선발했던 그들이었다. 풋풋했던 젊은 그들은 어느새 눈빛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내가 일하는 본관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내 책상 유리를 우산으로 깨부수는 일을 당할 때는 비애를 느끼기까지 했다. 정성껏 키워낸 자식들이 돌변하여 부모에게 칼을 겨누는 듯한 배신감과 무력감에 나는 종종 사무실에 홀로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다. 회사 정문과 후문은 노동자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했고, 우리는 회사 안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직원들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화장실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본관을 점거한 채 관리직 근로자들과 충돌했고, 쇠파이프와 몽둥이가 난무하는 가운데 수많은 인원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참혹한 광경이 수차례 벌어졌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