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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전태일과 화해하고 싶다》 < 3 > (完)

by 문용대

《이젠, 전태일과 화해하고 싶다》 < 3 > (完)


문용대(수필가, 소설가)


회사 밖은 더욱 아수라장이었다. 문 밖에는 경찰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며 화염병과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다. 시위대의 화염병이 굉음을 내며 터지고, 건물 벽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최루탄 가스가 매캐하게 공기를 가득 채웠고, 눈과 목이 따가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최루탄이 터질 때마다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 눈물이 단순히 최루탄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들이 달려야 할 창원대로에는 불붙은 폐유 드럼통이 수도 없이 뒹굴었다. 거대한 불기둥이 밤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매캐한 연기가 창원 시내를 뒤덮었다. 경찰과 노동자들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수년간 전쟁을 치렀다. 매일 아침 출근길은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고, 퇴근길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화염병 터지는 소리, 최루탄 터지는 소리, 그리고 시위대의 함성 소리에 시달렸다. 꿈속에서도 회사 건물은 불타고 있었고, 나는 그 불길 속에서 허우적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랐다. 나는 이십 년 가까이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 일터를 미련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나의 40대 초반은 그렇게 뜨거운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버렸다.


불 꺼진 뒤 남은 상흔, 그리고 화해


대일중공업의 끊임없는 노사분규는 결국 회사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제때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던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들은 더 이상 우리 회사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지금의 현대모비스 같은 회사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회사의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기업들의 성장의 발판이 된 것이다.


내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대일중공업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98년, 회사는 끝내 부도 처리되었고, 2003년에는 다른 업체로 넘어가 회사 이름마저 바뀌었다. 한때 5,400명이 넘던 종업원은 1,000명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하니, 4,4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그 뜨거운 용광로 같던 시절, 나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불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1987년,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이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았다.


나는 평생 그들을 미워했다. 강태우와 그의 변호를 맡았던 나 변호사, 민 변호사(웃날 유명 정치인이 됨). 그들은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노동 운동의 상징인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까지. 이소선 여사도 나 변호사처럼 대일중공업 시위 현장에 종종 찾아왔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으로 사회 분위기는 더욱 혼미해졌고, 노조원들은 문 목사가 방북 때 매고 온 빨간 머플러를 모두 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노조원들이 부르던 '아침이슬' 같은 노래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일흔 중반의 나이가 되어, 나는 다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전태일은 1948년생, 나는 그보다 두 살 아래다. 그는 열일곱에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했다. 나 역시 열일곱에 서울로 와 평화시장 근처 을지로 5가 방산문화사 인쇄소에서 일했다, 그곳은 선거철이나 연말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을 쫓으려 약을 먹고 며칠씩 밤을 새웠다. 한 번은 약을 먹었는데 잠이 쏟아졌다. 방 아랫목에 팔을 베고 잠들었다 깨보니 팔뚝이 따갑고 부풀어 있었다. 살이 익은 상처는 지금도 거무스름한 자국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신입사원이 잠 안 오는 약 대신 수면제를 잘못 사다 준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동대문에서 신설동으로 걸으며 피곤에 지쳐 눈뜨고 꿈을 꾸다 전봇대에 부딪혔다. 그만큼 고생했지만, 그 시절은 보람되고 행복했다.


전태일과 나는 서로 알지는 못했지만, 지척인 거리에서 3년 가까이 지냈음을 알게 됐다. 내가 고통을 묵묵히 견뎠다면, 전태일은 그 고통을 바꾸려 몸부림쳤다. 그의 일기 속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이라는 외침은 그의 절박한 외로움이었다. 강태우는 그 외침에 답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과 혼란이 뒤따랐고 나는 그 속에서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투쟁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었음을 이해하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보 대통령’이 전태일의 ‘바보회’와 겹쳐지며, 나는 그들의 진심을 다시 생각했다.


이제는 미움을 다 내려놓고 싶다. 전태일, 강태우, 이소선 여사, 그리고 그 시절의 나 자신과 화해하고 싶다. 나의 1987년은 악몽이었지만, 이젠 그 기억을 화해로 마무리하고 싶다. 전태일이 꿈꾼 세상은 어쩌면 나도 바랐던 세상이었다. 그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을까. 그 질문은 남아 있지만, 이젠 미움 대신 노래를 부르며 평화를 찾고 싶다. '늙은 군인의 노래'와 '아침이슬'이 아픈 기억이 아닌, 용서와 평화의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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