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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학교 박물관 국보와 나의 추억

by 문용대

선문대학교 박물관에서 만난 ‘국보’

그리고

55년 전 활자의 추억


문용대(수필가·소설가)


며칠 전, 충남 아산의 선문대학교 박물관을 찾았다. 이재영 전 박물관장(전 부총장)의 안내로 둘러본 전시실은 예상보다 훨씬 깊고 풍요로운 공간이었다.


박물관은 1992년에 설립되어 2005년 현재의 아산캠퍼스에 새로 개관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도자기, 회화, 민화 등 1,500여 점을 비롯해 서예와 조선 회화를 포함한 5,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한 ‘유물의 보고(寶庫)’다. 대학의 위상을 넘어,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열린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도 주목할 만했다.


청자와 명화, 눈으로 확인한 국보급 유물들


전시실에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국보급 명품들이 즐비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청자인 ‘청자상감파룡문대매병’을 비롯해 ‘백자청화칠보문호’, ‘분청자상감쌍어문편병’ 등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또한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 김홍도의 「고매도」, 신사임당의 「초충도포도」, 장승업의 「무림촌정도」 등 조선시대 대표 화가들의 작품들이 품격 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한 점 한 점이 세월의 숨결을 품고 있었고, 그 앞에 서니 가슴이 저릿할 만큼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웅장한 유물들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나라의 문화재 지정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우리 문화재 지정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였다. 1933년, 일제는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공포하고 1934년부터 보물 153건을 지정했다. 그러나 국권을 잃은 조선에는 ‘국보’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문화유산을 ‘보물’로만 분류했다. 그해 지정된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55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문화재를 재지정했지만, 일제가 정했던 순서가 그대로 이어졌다. 결국 국보 1호는 여전히 숭례문, 국보 2호는 동대문이다. 문화재의 번호 체계 속에도 식민 통치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2021년에 이르러 정부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문화재 간 서열 의식을 없애기 위해 국보와 보물의 지정 번호를 폐지했다.


55년 만의 재회 — 내 손으로 조판한 책들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한 진열장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55년 전, 내 손으로 만들었던 책자들이 진열장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69년 말, 경기도 구리에 있던 주간종교신문사 공무국에 입사해 창간 준비부터 6년여간 몸담았다. 당시에는 인쇄 기술이 전적으로 수작업에 의존하던 시절이라, 활자 주조(鑄造)부터 조판(組版), 정판(整版), 제본(製本), 재단(裁斷)까지 모든 공정을 도맡아야 했다.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무렵 유광렬 문화부장께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남보다 두 배를 살고 있는 거야. 남이 하루 사는 동안 자넨 이틀을 살고 있다는 말일세.”

그 말은 지금도 내게 가장 큰 위로이자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진열장 속에는 월간 『성화』, 『통일세계』, 『말씀』, 『뜻길』이 고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 내가 주조하고 조판했던 책들이었다. 그 옆에는 당시 사용했던 지형(地形)과 연판(鉛版), 활자 묶음이 함께 놓여 있었다. 보고 싶던 영자지 『The Way of the World』는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나는 『성화』 폐간호(1970년 6월호)와 『통일세계』 창간호(1970년 12월 20일)를 직접 조판했다. 세로 쓰기 형식의 『뜻길』 창간호 역시 내 손을 거쳤다. 원고가 늦어져 문화공보부 제출 기한을 맞추지 못해 『성화』가 폐간되던 날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활판 인쇄기의 쇳소리, 납 냄새, 손끝의 감촉이 그리워진다.


아쉽게도 그때 내가 조작하던 주조기(鑄造機)는 전시 공간 부족으로 현재 컨테이너에 보관 중이라 볼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공개된다면, 그 앞에서 사진 한 장 남기고 싶다.


이 유물들은 매일종교신문 이옥용 회장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출판 경력자로 공무국에 합류해 활자 진열과 문선(文選)을 맡았고, 훗날 시설과 인력을 인수해 운영하다 인쇄 방식이 현대화되자 선문대학교에 모든 장비를 기증했다. 덕분에 그 시절의 땀과 열정이 고스란히 박물관에 남게 된 것이다.


선문대학교 박물관에서 만난 웅장한 국보급 유물들과, 내 손때 묻은 낡은 활자들은 55년의 세월을 넘어 내 인생의 한 장면을 다시 불러냈다. 그날의 관람은 단순한 문화재 탐방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기억과 한 나라의 역사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나는 세월의 흐름과 그 속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을 다시금 깊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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