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수필]
문용대(수필가·소설가)
출퇴근길에 빵 가게를 볼 때마다, 한때 전북 익산에서 빵 장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보석 가공업체에 영입되어 일했지만, 예상과 달리 기업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40여 명의 직원을 내보내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의 책임을 내가 맡게 되었다. 직장의 상황을 예감한 아내는 후배의 제과점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밀탑제과'를 열었고, 나 역시 빵 장사에 뛰어들었다.
빵집 운영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주말과 명절도 없이 일했으며, 인건비 절감을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다. 열정을 다했으나,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결국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저가 공세를 펼치는 리어카 상인들에게 밀려 시설은 고철 값으로 팔려나갔고, 당시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음식 장사는 경험과 입지, 운영 마인드 등 많은 요소가 작용하지만 무엇보다 '운'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1994년경, 나는 전북 익산의 B아파트 건설 현장(영등동 이리동초등학교 부근)에서 3개월가량 일용직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마침 잡부 일자리가 있어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주요 업무는 입고된 자재 정리, 청소, 그리고 재활용할 굵은 각목(오비끼)에 박힌 못을 빼는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었다. 노루발 못뽑이(빠루)로 못을 빼는 작업은 보기와 달리 하루 종일 하기에는 쉽지 않은 고된 노동이었다.
일용직은 비가 오거나 하여 일을 못 하면 공치는 날이지만, 인력사무소에서 온 작업자들처럼 일당의 10퍼센트를 떼이지 않아 큰 혜택이었다. 건축 현장에서는 아침 시작, 오전 참, 점심, 오후 참, 그리고 작업 끝내기로 하루에 시작과 끝을 네 번씩 반복했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에 마쳤다. 꾀를 부리기는커녕, 남들이 흡연하며 쉬는 시간에는 쉴 줄 몰라 멋쩍거나 지겨워 눈치껏 일을 이어갔다. 회사에 지나치게 충성하는 모습은 동료들에게 미움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받은 일은 물론, 정돈 등 시키지 않은 일까지 알아서 척척 열심히 했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건축과장이 나를 불렀다. 그날부터 내 호칭은 '반장'이 되었다. 호칭의 변화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장은 "문 반장님은 앞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 나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비가 와서 작업을 할 수 없어도 일당을 주겠다는, 즉 '직영 반장'으로 일해 달라는 의미였다.
주말에 직장 동료였던 강성옥 씨 부부를 만났는데,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중에 들었지만 한여름 뙤약볕에 콧등과 볼, 귀가 까맣게 탄 내 모습을 보고 그랬다고 한다. 그들은 내가 막노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침내 딸이 현장 바로 옆 이리동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건설 회사가 학교 운동장에 콘크리트 조회대 설치(소위 '기부 채납') 작업을 할 때, 딸이나 딸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안전모를 푹 눌러쓰고 학생들의 시선을 피해 일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2001년, 서울 성동구에서 컴퓨터 학원을 운영할 당시, 학교 및 구청의 무료교육, 학원 난립, 수강생 모집난 등으로 운영이 어려울 때였다. 왕십리로 아침 운동을 나갔다. 새벽 6시도 안 된 시간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전풍호텔 부근 건물 3층을 오르내렸는데, 그곳은 인력사무소였다. 어느 날부터 건설 일용직 일을 시작했다. 며칠을 다녀보니 그날그날 일당 7~8만 원의 현금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작업복과 작업화가 든 배낭을 메고 매일 인력사무소에 들러 현장을 찾아가야 했고, 끝나면 인력사무소에 다시 가서 노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때로는 아침에 나갔지만 일할 자리가 없어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일을 하더라도 인력사무소에서 일당의 10퍼센트를 공제했다. 무학여고 부근 이수건설 모델하우스 현장 뒤편 사무소에 일자리를 부탁했더니 연락이 왔다. 이수건설의 하청 인테리어업체 A사였다. 그곳에서는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옷 배낭을 매일 메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작업 현장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퇴근길에 노임을 받으러 인력사무소에 갈 일도 없었고, 당연히 공치는 날도 없었다. 무엇보다 노임의 10퍼센트를 떼이는 일이 없었다.
모델하우스 작업이 끝나고 방배동 대우유로카운티 아파트 현장에서 같은 A사 소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건축 현장에는 안전 주의사항이 많다. 규칙에 따라 하라는 것은 하고,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된다. 나는 언제나 시키는 대로 안전모에 끈 매는 것은 물론 안전화에 각반(안전화 위 발목에 매는 헝겊 띠)까지 깔끔하게 복장을 갖추고 일했다. 평소 나를 눈여겨본 대우건설 안전과장의 추천으로 현장 재해 방지에 기여했다고 표창장과 남녀 손목시계 한 세트를 받았다. 막노동판에서도 상을 주더라.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 편한 일자리가 있었다. 한두 시간 일하면 하루 일거리를 다 해치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달 가까이 그런 생활을 했다. 일이 편해 복에 겨운 것이 아니라,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기가 싫어 며칠간 노동부 일자리 사이트를 뒤졌다.
구인광고를 어렵게 찾아 서초동 예술의전당 앞 E사에 입사했다. 그 회사는 타일, 미장, 조적, 방수 공사를 하는 중견 전문 건설업체였다. 타일, 모래, 시멘트, 타일 본드 등을 기공이 일하기 쉽도록 옮겨 주고 청소 등 잡다한 일을 하는 조공(助工) 일이었다. 타일 공사용 자재는 부피가 작아도 무척 무거웠다. 아침마다 출역일보(데스라)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현장에는 '다데', '요꼬'는 물론 '바라시', '오사마리', '와리', '가네', '데마찌' 등 작업 용어와 '기리', '노미', '고데', '반생' 등 공구나 소모품 이름까지 일본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나는 과거 대기업 종합금속제품 제조회사에서 여러 해 동안 선반, 밀링, 연삭 등 범용 공작기계는 물론, 정밀 작업용 지그보링머신(Jig Boring M/C) 등 공작기계 가공 경험이 있었다. 7개월간 학원에서 일본어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용어를 이해할 수 있어 현장 적응이 아주 쉬웠다. 노동일이 힘들어도 흘린 땀은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 그걸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속된 말로 건설 현장에서 박박 기고 있는 사이 6개월이 지나자 사무실에 와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총괄 부장 발령이었다. 현장 조공이 총괄 부장이 되었다 하니 같이 일하던 현장 소장, 작업반장, 작업자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업무용 자동차, 휴대전화, 법인카드를 받았다. 하는 일은 사무실 내부 업무는 물론, 사장 대신 기관이나 기업체 회의 참석, 전국 현장의 품질관리, 수주 입찰을 위한 현장 설명회 참석, 그리고 작업자가 필요한 공구를 사다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일인 다역으로 일했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에게 목숨도 바친다고 했던가. 더 열심히 일했다. 그곳에서 8년 4개월간 일하는 동안 아이 둘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노동 관련 학술연구단체로부터 근로 평화상으로 200만 원의 상금도 받았다.
서울 삼성역 부근 144실 규모의 숙박 시설인 C레지던스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C레지던스 운영업체 H사는 D사와 관리 용역 계약을 맺었고, 나는 D사 소속 관리소장으로서 시설물 관리, 관리비 산정 및 부과, 인원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으나, 용역업체 소속으로 일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 구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입사 2개월째 되던 달, H사와 D사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재계약이 필요한 시점에 D사는 저가 견적을 제시한 S사에 밀려 결국 탈락했다.
나를 제외한 D사 소속 직원 7명(시설 관리원, 주차원, 룸 메이드 등)은 S사로 고용 승계가 되었지만, 소장인 나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입사 2개월 만에 실업자가 되는 현실은 실로 괴로웠다. 마침 시설 직원 1명이 자진 퇴사하는 바람에 일자리가 하나 남게 되었다. 자존심 따위는 다 버리고 새로 온 S사 소속 젊은 소장에게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급료도 깎이고, 소장 밑에서 한 달이 지났다.
"이달 말까지만 일하고 나오지 마세요!"라는 소장의 말 한마디에 어쩔 수 없이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실업자 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11년간 고용보험료를 납부해 왔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해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80일 이상 근무해야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법규 때문에 단 한 푼의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사실 나는 창원의 대기업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만 10년을 인사부에서 일했다. 갖가지 노동 관련 법규에 따라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한, 나름 인사노무 분야에 능하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그렇지만 용역업체에 대해서는 이제야 알아가고 있었다. 해고를 당했지만 H사나 D사 그리고 S사, 어디에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역시 고용노동부에 실업급여도 요구할 수 없었다. 유기 계약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애를 처음으로 절감한 순간이었다.
룸 메이드 5명 중에는 1년에서 4일이 모자라 퇴직금을 못 받는 강 씨, 신 씨 두 여성이 있었다. 나는 D사에 근로자들 잘못이 아니라 용역 계약을 갱신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고 단 4일이 부족하니 퇴직금을 지급하자고 건의했다. 대답 대신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끝내 퇴직금은 받지 못했지만 일이라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룸 메이드 강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근로자들 피 빨아먹고 사는 게 용역업체예요. 4일이 모자라는데 퇴직금 주겠어요?" 물론, 대부분의 용역업체는 다를 것이다. 강 씨 등은 이미 용역업체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던 것이다. D사 그들은 나를 순진하고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2014년 1월부터 서울시 영어 마을 S캠프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직장을 구할 때 서류만 통과되면 면접에서는 대체로 잘 붙는 편이었다. 그곳 영어 마을 S캠프도 서울시가 직접 운영을 하지 않고 Y사가 운영 중, L사와 관리 용역 계약을 맺었고, 나는 그 L사의 시설 관리원이었다. 나는 어디서나 맡은 일에 대하여 성심을 다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갔다.
L사 관리소장 이 씨로부터 지난해 삼성역 C레지던스에서 들었던 똑같은 말을 또 듣게 되었다. "이달 말까지만 일하셔야 되겠습니다!"
허허, 얇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유인즉, Y사에는 권 대리 밑에서 일하는 이 모 차장이 있었다. 깊은 그들 사정은 내가 알 바 아니다. 차장을 대리 밑에서 일하게 하면 자진 퇴사할 줄 알았는데 계속 버티고 있단다. 그래서 내가 속한 L사 정원 1명을 줄여서, 즉 최근에 입사한 나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이 차장이 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L사 이 소장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해고 통보를 받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L사 전 전무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납득되지 않을 경우 Y사 화 본부장(원장)을 상대할 것이고 그래도 안 되면 서울시장을 상대할 예정이었다.
작년 C레지던스에서는 법적으로 해 볼 방법이 없어 꼼짝 못 하고 해고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분명 승산이 있는 게임이라고 판단됐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니 약간의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L사 전 전무와의 면담에서 탁자를 내려치며 했던 말이다.
"해고 사유가 뭐냐? 인사노무 분야는 내가 당신들보다 못하지 않다.
대기업체에서 인사 분야의 일을 해 본 사람이다.
당신들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뵈는 게 없느냐?
약자라고 너희들 맘대로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3개월이 안 됐다고 맘대로 해고해도 되는 줄 아느냐?
소위 임시, 수습, 시용 기간이라고 하는 그 3개월은 맘대로 해고하는 기간이 아니다.
근무를 계속시킬 수 없을 만큼 내가 무얼 잘못했거나, 감원을 하지 않으면 사업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하고 중대한 사정이 있을 경우, 그렇더라도 관련 부처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서 내 집 일처럼, 동료들은 내 동생이나 조카들처럼 생각하고 도맡아 했다.
그 대가가 이거냐?
요소요소에 있는 CCTV를 확인해 보라!
나는 절대 안 나간다. 어떻게 할 테냐?
해고가 철회되지 않을 경우 Y사 원청 서울시장과 싸우겠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L사 전 전무의 얼굴은 홍당무가 돼 쩔쩔매고 있었다. 나의 호칭은 그 시간부터 '문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서울시 감사 총괄팀 조 팀장(여)에게 이메일로 아래 내용을 포함하여 7개 항목으로 정리한 '부당해고(예고) 통보에 대한 진정서'를 보냈다.
"해고를 당할 만한 어떠한 이유도 없다. 인권을 유린하고 생존권을 박탈하는 처사이다. 서울영어마을 S캠프는 사기업이 아닌 공공기관 서울시가 위탁 운영하는, 그리고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곳에서 납득할 수 없는 비극이 발생했다. 해고는 반드시 철회되어야 한다."
밤 9시가 돼서야 이메일 열람을 하더니 즉시 답을 보내왔다.
"본건에 대해 조사하도록 평생교육과 권 아무개 주임에게 업무 배정을 했습니다."
다음 날 서울시청 권 주임으로부터 "Y사에 경위서 제출을 요구했고, 경위서를 받고 나서 감사를 실시할 것이다"라고 들었다. Y사에서는 그 후로도 요리조리 말 바꾸기와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거기에 대응해서 2차 진정서에 12개 항목의 내용을 추가했고, 3차에는 나의 의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냈다.
감사를 나온다는 날 아침 일찍부터 손님(감사요원) 맞이할 준비로 그 넓은 단지가 온통 부산한 모습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지켜보았다. 감사요원 5명이 몇 시간째 머물다 간 후, 하얗게 질린 기색의 L사 전 전무가 만나자고 했다. 서울시 감사실에 접수한 진정서를 취하해 달라며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Y사에서는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달 26일로 끝나는 용역 재계약 불가 방침으로 L사의 목을 죄는 모양이었다. 전 전무는 Y사와 나 사이에 끼어 어찌할 줄을 모르는 걸 보니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L사도 사실 약자라서 피해자였다. Y사의 화 본부장이라는 자가 하는 짓을 봐서는 갈 데까지 가고 싶었지만, 힘없는 L사의 전 전무와 이 소장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할 수가 없어 진정을 취하했다. 절대 못 나가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받아내긴 했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해고를 당한 셈이었다. 강자는 이기고, 약자는 지게 돼 있나 보다! 또 직장을 찾아 나섰다.
일흔 중반인 나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 또는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것이 그것이다. 건축 현장 경험이 없었더라면 관리소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설령 되었다 하더라도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이나 경비, 전기, 영선, 미화 등 관리 인원을 단지 입주자대표회의 직영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관리 용역업체에서 인원을 채용하여 단지에 파견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 용역업체 소속으로 일했다. 나는 경비원 등 직원을 채용할 때나 근무하는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당부하는 말이 있다. "소장을 포함해서 우리는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 근로자입니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열심히 일해주기 바랍니다."
'항상'이라는 말의 뜻은 이렇다.
"고령인 우리들은 늘 긴장하고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몸조심을 해야만 한다. 처음 입사해서 시용 기간 3개월 동안 특히 눈 밖에 나지 말아야 되고, 근로계약기간 1년이 종료되고 나서도 재계약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입주자대표회의와 용역업체 간 재계약을 하거나, 업체가 바뀔 때도 자칫하면 재계약을 못하거나 고용 승계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된다."는 말이다.
고령 비정규직인 우리는 사장님(?)들을 많이도 모시면서 일한다. 200세대 아파트라면, 남자 사장님, 여자 사장님, 할아버지 할머니 사장님, 아들딸 사장님. 평균 세대 당 4명으로 계산할 때 800명의 사장님을 모시면서 일하게 된다. 그중에는 참 좋은 분들도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 현장에서 일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3D 업종으로 분류한다. 나는 건축 일은 참 좋은 직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겠다. 그 첫째 이유는 노동의 대가로 인한 행복감이다. 잡념이 사라지고, 잠이 잘 와 건강에도 좋다. 투자액이 적거나 없이도 벌이가 괜찮으며, 노동으로 인한 돈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것만이 아니다. 건축을 알면 사는 데 활용할 곳이 참 많다. 건축직 구인광고가 그렇게 많은데, 일자리가 부족하여 사회문제가 되다니…. 이럴 때일수록 건축 일을 해 보라고 젊은이들에게 더 권하고 싶다. 건축을 알아야 나이 들어 아파트나 빌딩 관리하는 경비원으로 취업을 하더라도 쉬울 것이며, 일도 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집도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현관문 밖에 음료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옆집, 아랫집, 윗집 할 것 없이 8세대 모두에게 놓여 있었다. 상자 겉면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옆 빌라에 사는 젊은 부부가 이사를 간다고 했다. "5월 10일 이사하게 되어, 오전 8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소음이 발생할 수 있고, 사다리차 사용으로 불편을 드릴 수 있어 미리 양해의 말씀 올립니다. 최대한 피해가 안 가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내가 일하는 아파트 단지 9층이 내부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호두과자 선물세트에 '손으로 쓴 편지'를 붙여 집집마다 돌렸다. 관리사무소와 미화원 몫까지 잊지 않았다. "힘든 시기에 불편을 끼치게 되어 죄송한 마음을 담아 준비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말씀드려야겠지만, 비대면으로 하는 게 나을 듯하여 문 앞에 두고 간다.'며 양해를 구하기까지 했다.
얼마 전에는 이사를 앞둔 젊은 부부가 관리사무소를 찾아왔다. 일주일간 내부 공사를 할 예정인데, 이웃집에 피해를 줄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부부는 한 달 전부터 공사 안내문을 붙이고, 종이봉투에 과자를 담아 사람들과 나누었다.
오늘 출근하고 보니, 책상에 말랑말랑한 떡이 놓여 있었다. 어제 이사 간 집에서 두고 갔다고 했다. 이사 오는 집이 아니라, 떠나간 집에서 떡을 준비하다니… 그 마음씨에 감동해서 전화로 고마움을 전했다. 아름다운 이웃을 두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