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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시그널을 품고 있다


일어나기 전에 이른바 징조가 있다. 징조가 실제 징조 인지였는지는 일어나 봐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징조는 앞서 말해지는 경우가 드물다. 사후에 예지자가 들끓는 이유다.


원인이 없을 수는 없으나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 알기가 어려워졌다. 이제는 하나의 원인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딱 맞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은 더 이상 없을 듯싶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과관계'로 만들어 내는 결과는 나올만한 건 이미 다 나왔다. 결과가 나타나는 시기도 들쑥날쑥이고, 주변에 무수히 많은 변수가 널려 있어 하나를 설명하여 그럴싸한 결과라고 연결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과가 분명할수록 연결 지어 만들어내고, 확장해 넓혀 갈 수 있는 게 더 풍성해진다. 이해하고, 논리를 만들어 체계적인 틀을 세우는데 '인과' 만큼 탄탄한 사고방식도 없다. 분명하지 않고, 복합적인 게 많아졌다. 사실 이전부터 그랬는데 우리가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정도가 그만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보이고 이해할 만한 그만큼 수준으로 충분했는 지도.


한편 이미 있었으나 알지 못하고, 알려 하려 하지 않았으나 다시금 선을 그어봐야 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나씩 선을 긋다 보니 다음 영역으로 연결 지을 그럴싸한 근거나 설명이 더 정교하게 필요해졌고, 그러다보니 더 어렵고 복잡해졌다. 선을 그대로 따라가 봐도 시작점을 알기 어렵고, 돌고 돌아 출발 근처에 다시 오기도 한다. 난감한 원인 찾기라 다른 방식의 패턴 읽기가 필요해졌다.


징조나 시그널이나 사전적으로는 유사한 의미인데, 징조는 알아채고 미리 말해야 그 맛이 있다. 누구나 다 알 수는 없는. 시그널은 알아챌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는 조짐이라는 느낌이 있다. 크게 예민하지 않아도, 범상치 않아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신호를 담아 설계하고, 장착해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많아진다. 감추는 묘미도 있고, 알아채야 효용을 더 깊게 할 수 있어 찾아내고 싶은 시그널이 있다.


시그널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칠흑 같은 밤하늘의 별빛 같지 않다. 별빛이 내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저마다 별빛을 바라보며 만들어내는 나의 스토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별빛보다는 나의 별빛이라 내 마음에 따라 빛의 밝기가 달리 보인다.


모든 것은 시그널을 품고 있다. 그리고 깜빡깜빡 시그널을 계속 보내고 있다.

'징조'를 알아챌 수 있도록 누군가가 예지력을 발휘하든, 사후 설명의 근거로 삼든 '아, 그래?' 정도의 공감 이라면, '시그널'은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메시지를 나만의 신호로 받아내는 의미와 설렘이 있다.


시그널 자체가 전부인 경우도 있지만, 깜빡거리는 신호의 조짐을 누군가 알아채 나만의 메시지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밤하늘에 덩그렇게 떠 있는 희미한 별과 같다. 사실 별빛은 우리를 위해서 빛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별빛에 의미를 잔뜩 부여해야 더 특별하고 반짝여 보인다.

 

빛나지 않고 계속 깜빡이지 않는 시그널은 드러나지 않으니 메시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대놓고 드러낸 시그널은 잘 전달될지는 몰라도 너무 선명해서 고유한 메시지로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짝 감추어진 듯, 흘깃 내어 보이는 듯한 움직임으로 만들어 내는 별빛을 더 아름답다 느낄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나만을 위해 빛나고 있을 별을 찾아내려 한다. 그리고 품고 있을 시그널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려 한다. 


밤하늘의 별빛이 모두 균일하다면 오히려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쏘아 내는 별빛이 저마다 달라야 밤하늘이 더 빛나 보이는 것처럼. 그래야 별이 보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 다른 빛의 세기를 갖고 있을 것이고, 각기 다른 시그널을 품고 있을 것이며, 

그래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엮어 오늘도, 어제와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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