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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Oct 19. 2021

49살 초짜 미쿡교사, 고군분투의 첫 학기

나의 첫 학생들을 만나다!


이제 곧 학생들을 만난다! 기다려진다!


나의 가슴은 마치 첫 소풍을 앞둔 초등학교 1학년생 마냥 설레었다. 미국 대학에서 강의한 적은 있지만, 미국 학교에서 처음 영어를 가르치는 거라 한편 긴장도 되었다. 스스로를 믿었다. 처음엔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자신감과 열정을 가지고 헤쳐나가리라.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왔던 나의 걸음걸음을 뒤돌아 보았다. 그 가운데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돌이켜보았다. 실패와 좌절에 무릎 꿇지 않고 성취하고 성공했던 경험을 되살아났다. 이 기억들이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떤 도전이 초짜 미국 교사인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미국 학교 교사로서의 첫날,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등교 모습, 이를 맞는 교장과 교감, 교사들의 모습, 각 교실의 수업 모습,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의 사랑스러운 학생들과의 만남. 하루에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나의 두뇌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정보를 담아내고 해석하느라고 하루 종일 분주했다.


노란 스쿨버스들이 학교 주차장에 늘어서 있다. 학생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학생들 상당수가 흑인이다. 라티노, 백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건물로 들어선다. 학교 건물 입구에서 교장과 교감은 아침 인사를 하며 미소로 학생들을 맞는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면 그들을 반긴다. 머리를 자른 아이에게는 짧은 머리가 멋지다는 칭찬도 곁들인다. 교장과 교감은 400명이 넘는 아이들의 이름을 다 알고 그들의 신상까지도 다 꿰고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학생들을 맞이하는 것은 교장과 교감과 같은 교육 관리자들의 일상이다.


교사로서의 내가 마주한  미국 학교의 첫 모습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리더십은 가장 친근하고 기본적인 것에서 시작되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교장이나 교감은 뒷짐을 지고 일반교사들에게 지시하는 권위의 표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교육의 최일선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교류하고 교감하는 교육자의 모습이었다. 처음 미국 학교 교단에 선 날, 아침 등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리더십의 모습을 보았다.


미국 교사로서의 첫날 나의 학생들을 만났다. 반짝이는 눈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대부분은 케이프 버드 Cape Verde나 아이티 Haiti  출신의 흑인이었다. 라티노 학생이 두 명,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인도 출신의 학생도 있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에서 온 학생들, 이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펼쳐질 학교생활이 무지개처럼 그려졌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낼 알록달록 멋진 하모니가 펼쳐질 것이다.  잘 될 것 같은 이 느낌이란! 그렇게 이곳에서의 매일이 밝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내가 방문한 첫 교실은 3학년이었다. 교실문을 열자 40여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 교실의 담인 선생님은 20대 중국인 2세 여성이었다. 내가 가르칠 ESL 학생이 그 교실에 3명이 있어, 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담임교사가 나를 소개할 기회를 주었다.


“여러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나는 ESL 선생님입니다. 여러분 반에 3명의 친구가 앞으로 나와 함께 공부하게 됩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여러 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루는 이 교육공동체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혹시, 한국에 대해 알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찾아오세요.”


나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교생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내가 가르칠 학생들이 속한 교실마다 방문해 나를 소개했다. 거의 전교생에게 나를 소개한 셈이었다.  모든 교실에서 학생들은 자신들 속에 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듯 뜨거운 박수로 나를 맞아주었다.


모든 교실이 흑인, 백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의 샐러드볼과 같았다. 흑인이 대다수이지만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교육 공동체다. 다양성과 그 안에서의 조화는 미국 사회의 기본 가치다. 그 다양성을 풍부하게 할 한국에서 온 교사를 이들은 뜨겁게 맞아주었다. 이 학교에는 두 명의 중국인 교사가 있다. 한국인 교사는 개교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나의 첫 출근은 따뜻한 환영으로 시작되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아이들. 다양한 인종,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모습의 아이들과 이제 한배를 타고 항해를 떠난다. 내 학생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아이들과의 만남이 꽤 인상적이었다. 비드 장식으로 브레이드 한 머리를 늘어 뜨린 여학생들이 햐얀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 접하는 흑인 학생들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많은 흑인 아이들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만나자, 미국 교사로서의 출발이 실감이 났다. 49살 초짜 미쿡선생님의 좌충우돌 고군분투의 첫 학기가 시작됐다!


49살 초짜 미쿡교사의 첫 학기


첫 학기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학년부터 8학년까지 30명 정도의 학생을 가르쳤다. 1학년에서 8학년까지 골고루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내 발전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각 학년의 교육과정을 다 꿰뚫어야 했다. 미국 초중학교, 8개 학년의 교육과정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ESL 프로그램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고 커리큘럼이 없었기에 커리큘럼 짜느라고 매일 머리 싸맸다. 


계약서 상으로는 8시간 근무이지만, 실제로 학교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8시간 30분 정도였다. 내게 주어진 하루 수업시간은 6시간 45분이었다. 일일 수업시수 6시간 45분. 교사생활을 하며 가장 긴 일일 수업시수를 경험했다. 


퇴근 후에도 학교 일을 싸들고 와서 집에서 하기가 일수였다. 교육과정을 만들고 수업 안을 짜느라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이 허다했다. 심지어 주말에도 학교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완전 초짜 햇병아리 교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수업의 30% 정도는 푸시인 수업모형 Push-In Model이다. 일반 교실에서 교과 담당교사와 공동으로 수업을 하는 형태다. 수업의 70%는 풀아웃 모형 Pull-Out Model으로, 소그룹으로 가르친다. 소그룹 티칭은 한 그룹에 대개 4명~7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공동수업을 하려면, 미리 교과교사와 협의도 해야 하고 교육과정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공동수업을 하기 전에 교과교사의 수업 안을 숙지하고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을 의논하고 정한다. 소그룹 수업에서는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는 맞춤형 수업으로 진행된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영어능력 수준과 특성에 맞는 커리큘럼을 고안하고 자료를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정, 수업안과 교재, 학습지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미국의 많은 학교에는 교과서가 없다. 교과서는 교사의 선택이다.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채택 여부는 전적으로 교사의 결정 사항이다. 교사 자체가 교육과정이고 교과서인 셈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하는 교사는 큰 책임과 노력을 부여받는다. 반면, 자유롭게 교육과정을 짜고 교재를 선택할 수 있기에 교사의 재량이 발휘될 여지가 많다. 교육과정을 디자인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만큼 교사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특권 또한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 커리큘럼을 자유롭게 구성해 나만의 수업을 만들어 가면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은 고된 노력 뒤에 맛보는 달콤한 열매와도 같았다. 


영화 볼 시간도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경기를 보러 갈 시간도 없을 정도 학교 일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먹고 자고 집안일을 하는 것 이외에는 오로지 학교일이었다. 생존을 위해 내 프로페셔널을 세우기 위한 분투의 날들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다 보면 노하우가 쌓이고, 언젠가는 좀 더 수월하게 가르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축복의 교실


아이들 가르치면서 매일 축복받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도 수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첫 미국 교단에서 이곳 학생들 가르치면서 매일 새롭게 배웠다.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과 호흡하는 게 무엇인지. 가르치며 배웠고성장했다. 매일매일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에서 15년을 가르쳤고 미국 대학에서도 가르쳤지만, 미국 초중학교에서의 교사생활은 전혀 새로운 것이 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미국 교단에 다시 교사로서  태어났다. 


나의 학생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아주 어렸을 때 이주한 경우다. 그들의 말하기 능력은 좋은 편이었다. 네이티브의 발음으로 일상생활영어의 구사는 아주 우수했다. 내가 수업을 하는 장면을 본다면 어떤 점에서는 특이하다. 한국어 악센트가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교사가 네이티브 발음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광경이다. 그들은 나의 학생이고 나를 통해 영어를 배우고 영어능력을 높인다.


학생들은 아카데믹 영어가 많이 부족했다. 아카데믹 어휘, 독해와 글쓰기 지도가 수업의 중심이었다. 아이들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들의 읽기와 쓰기 능력 Literacy을 높이기 위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매일 고민했다. 정답을 알려주는 교과서는 없다. 학생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파악을 바탕으로 내가 쌓은 언어 습득과 언어교육 이론을 적용하는 길 뿐이다. 어떤 학생은 말하기는 유창하지만 책을 유창하게 읽지 못한다. 어떤 학생은 말하기와 낭독은 유창하지만 책을 읽고 맥락을 파악하고 텍스트와 텍스트를 연결하는 고등 사고능력이 부족하다. 독해는 잘 하지만, 논리적인 글쓰기가 부족한 경우도 있다. 학생들의 강점을 살리고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어 갔다. 


교직의 가장 큰 보람은 뭐니 뭐니 해도 함께 부대끼며 호흡하고 소통하는 아이들이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흑인 학생들! 그들은 유난히 정이 많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나를 볼 때마다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두 팔을 벌려 안기며 내게 얼굴을 비빈다. 중학교 여학생들도 내게 허그를 하며 애정을 표현한다. 나보다 체구가 큰 7,8학년 여학생들이 나를 꼭 안으면 아침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 시절 90년대 초 20대의 풋풋한 교사로 아이들에게서 느꼈던 그런 정감을 흑인 학생들에게서 느꼈다. 흑인 학생들은 많은 면에서 한국인들의 정서와 닮았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흑인 아이들과 생활하며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순간을 매일 체험했다. 아이들이 순하고 착했다. 가을학기가 지나고 봄학기를 맞이할 즈음, 나와 정이 많이 들어 잘 따랐다. 


이 차터스쿨 학생들 대부분은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들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가정 형편이 어렵고 부모의 관심을 많이 못 받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학생들을 대하는 내 마음은 각별했다. 정말 내 아이를 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사랑과 정성으로 학생들을 만났지만, 때로는 나의 진심과 노력이 어려움을 마주하기도 했다. 


학생들과의 관계가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간혹, 수업 중에 말썽 피우는 학생도 있었고 내 속을 태우는 아이도 있었다. 실은, 열심히 잘하는 학생들보다는 실은 삐딱하고 말 안 듣는 학생들이 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소위 문제아 때문에 속 썩는 경우, 나만의 방법이 있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가 내 나름의 방식이다. 말이 쉽지, 내 말 안 듣고 애간장 태우는 애들 예쁘게 보기가 쉽지는 않다.  근데, 그 애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원인을 잘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학생들의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이해한다면 그들이 문제아로 보이지 않고 나의 특별 애정 대상으로 바뀌었다.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보이는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조차 관심과 애정을 못 받는 애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더 잘해 주려고 했다. 간식을 싸다가 아침에 일찍 교실 책상에 놓아두기도 하고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때 예쁜 카드와 선물도 주기도 했다.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건네려고 했다. 그러면, 아이도 서서히 내게 호감을 보였다.


내 수업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에서도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소란을 피워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가정 형편이 극도로 안 좋았다. 그의 형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갱단에 연루되었다가 총을 맞아 사망했다.  그 트라우마로 이 아이도 많이 힘들어했다. 싱글맘인 엄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 해야 했다. 학교에 아이 간식을 못 챙겨 보낼 정도로 엄마는 생활고에 힘겨워했다.


아침마다 내 아이의 간식을 싸면서 이 학생의 간식을 같이 챙겼다. 아침에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 그 아이의 책상 위에 간식을 놓아두었다. 집에 과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과일을 준비해 수업 중에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다. 아이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했다. 그를 가르치거나 훈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거부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점차 수업태도도 좋아졌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를 발견했다. 가끔 수업시간에  수업을 안 따라오고 속을 태울 때도 있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아이라 그리 밉게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이 느껴져 살살 달래 가며 가르쳤다.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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