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엄마란
엄마라고 부른 시간이 27년, 엄마가 된 지 19년.
엄마라 부른 시간이 더 긴 만큼 아직 “엄마”라는 이름의 중압감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낳고, 키우고, 보살피는 과정을 하는 사람, 그것이 엄마라면 나는 지금 잘 해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내 아이가 엄마가 되었을 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의 기준은 내 엄마에게서 얻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엄마는 바빴다. 자식을 돌보고 키우는 것까지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를 좋은 엄마라고 말할 수 있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 답할 수는 없다. 왜냐면 나는 늘 엄마가 그리웠으니까 말이다. 그녀에겐 능력이 출중해서 더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 자식이 하나 있었고, 반면 문제만 일으켜서 사고 수습을 해야 했던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불만 하나 없는 자식, 내가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부담이 없는 자식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불만 하나 하지 않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내 외로움을 알아봐 달라고 하기엔 그녀가 너무 고달파 보여서 차마 손을 내밀 틈도 엉덩이를 디밀 자리도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두 손은 항상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고, 내가 잡을 손은 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엄마가 되면 내 아이가 날 원할 때는 항상 모든 걸 접어두고 아이를 보자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을까? 그러긴 했다. 그건 아주 어릴 때와 지금 와서 말이다. 그 사이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아프기도 했고, 그들 곁을 비우기도 했으니 솔직히 모르겠다.
나 살자고 아이들을 두고 떠났다. 하지만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상황이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지만, 내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매 순간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묻지 못한다. 미안함에 장사는 없으니까.
나는 엄마로 산 19년의 삶의 후회가 섞여 있다. 누구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나는 그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왜냐면 엄마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잃은 엄마가 엄마의 삶을 살 수는 없다고 본다. 어떤 사람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돌볼 수는 없으니까 나 역시 후회의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찾았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아이들 곁에 좋은 엄마로 남을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를 잃어버린 시간 동안 나는 자식들에게 비수를 꽂고 있었고, 그 비수가 살을 비집고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떠났다. 그것을 어린 그들에게는 이해해 달라고 바라지는 않는다. 단지 엄마도 사람인 것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모성애를 묻기 전에 사람인 엄마를 이해해 주길 감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