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후회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엽편소설
“미안해. 나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어.”
마치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맥주잔을 들어부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와 사귄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하나같이 말렸다. 분명 몇 달 사귀고 차일 거라면서 그의 바람둥이 같은 여성 편력에 대해 주야장천 떠들어댔다. 평소 그는 주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늘 같이 다니는 여자는 매번 바뀌었고, 그에게 여자는 쉬운 상대처럼 보였다.
“진아, 네가 좋다.”
너무나 황당해서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네? 선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과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데이트할 수 있는 그가 평범하고 아담한 키에 숫기 없는 진에게 프러포즈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심이야, 나의 여자 친구가 되어줘.”
멋있는 프러포즈도 아니었다. 그저 관심 끌기 작전인가? 생각할 정도로 평범하고, 솔직한 말이었다. 처음엔 거절했다. 친구들 입김도 있었지만, 어딘지 가벼워 보이는 그래서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은 마음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는지 주변 정리부터 말끔히 하는 것부터 시작으로 매일 진의 주변만 어슬렁거렸다. 마니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진을 챙겼다. 그의 관심이 시작되고, 진도 그가 점점 눈에 밟히게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집이 있는 창원으로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신없는 장례식장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였다. 제일 친한 친구들이 내려왔다. 그 사이에 그도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바삐 움직였으며,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서 진을 챙겼다. 모두가 돌아가고, 진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가 배웅 나왔다. 말없이 짐을 들어주고, 기숙사 입구까지 데려다준 후 돌아서 갔다. 그제야 진의 마음이 열렸다.
애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남자 사람 친구는 많았다. 그러나 한 번도 이성적으로 느낀 적이 없었기에 그와 하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반면 그는 능숙했다.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항상 느긋하게 기다렸다. 진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쌓인 믿음이 3년 만에 깨졌다.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고….”
그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고작 다녀봐야 1년밖에 다니지 않은 회사에서 얼마나 좋은 여자를 만났기에 진을 버리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오는 동안 머리에서 가슴 언저리까지 젖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기숙사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익숙한 방에 들어와서야 주저앉아 울었다. 함께 생활하는 룸메이트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면 이별이 진짜 사실이 될까 봐 두려웠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울고 싶었다. 어쩌면 이대로 자고 깨어나면 다시 다정한 그가 아침을 깨워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진의 입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를 깨운 건 룸메이트였다.
“어서 일어나. 너 오늘 면접이라고 했잖아.”
힘겹게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사물함을 열었다. 유일한 정장은 그가 며칠 전 사준 정장이었다. 오늘 면접을 위한 선물이었다. 꼭 이 옷을 입고 면접 가라며 그러면 십중팔구 붙을 거라며 웃던 그의 하얀 이가 생각난다. 깔끔한 흰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는데, 그가 작년에 사준 반지가 반짝거린다. 아직은 뺄 수 없었다. 그와의 이별을 인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진아, 면접 잘 봐.”
기숙사를 나가자 그새 적응된 얼굴들이 하나둘 보인다. 진을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웃어주어도 그녀의 얼굴은 웃지 못하고 더욱 슬퍼질 뿐이었다. 왜 하필 어제여야 했을까? 그도 오늘 진이 면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어차피 헤어질 거 하루 늦춘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면서 그리 급하게 해야 했을까? 괜히 괘씸함에 화가 난다.
덜커덩거리는 버스 안에서 항상 그와 같은 앉았던 뒷문 바로 뒷자리가 또 비어 있다. 혼자 않기 싫어 반대편에 앉았으나 자꾸만 시선이 간다. 진이 가고 싶었던 회사에 가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온통 한 사람만 생각하고 있었다.
“1102번, 1103번, 1104번 들어오세요.”
드디어 진의 번호가 불렸다. 크게 호흡하고 면접실로 들어갔다. 몇 개의 영어 질문과 까다로운 질문들에 신중하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사히 면접을 마친 진은 합격 여부에 대한 미련은 접어두고, 급하게 온다고 들리지 못한 화장실부터 갔다. 잠시 후 거울 앞에서 명찰을 떼어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면접 본 사람들이 내려오고 가는 동안 기다림이 길어졌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비상계단을 찾아 하나씩 내려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강 대리님 덕분이죠.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니에요. 상민 씨가 일을 열심히 하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죠.”
익숙한 목소리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리움처럼 다가왔다. 그리움이라는 이끌림으로 점점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의 몸에 거리낌 없이 스킨십하는 그녀가 보였다. 진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주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몸을 밀착했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불쾌함과 짜증이 났으나 무엇보다 회사가 아닌 여기에 왜 그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제 물어볼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걸 노려보다 그만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계단을 굴러가기 직전 익숙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였다.
“민…, 아니 고맙습니다.”
그의 이름은 상민이었지만, 진은 ‘민 오빠’라고 불렀다.
“괜찮아?”
그가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자,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녀는 진을 유심히 바라보다 소리쳤다.
“이 여자예요? 상민 씨 전. 애. 인?”
그 옆에 찰싹 붙어서 마치 현 애인처럼 굴며 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상민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지만, 자꾸 진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진이 그녀에게 무시당하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강 대리님. 저는 이만 가죠.”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겨우 고비만 넘긴 거잖아요. 다시 들어가서 수습해야지 어딜 간다는 거예요?”
이미 큰 고비는 넘긴 상태였고, 뒷수습이라고 해봐야 그녀가 마련해 준 자리에 대한 보답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 진에게 함부로 하는 그녀를 보자 더 이상 비위를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진아.”
괜히 강 대리의 히스테리에 진이 상처받을까 걱정되었다. 진을 붙잡기는 했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다. 진은 여전히 그의 말투가 다정해서 싫었다. 마치 어제 헤어지자고 한 적이 없던 사람 같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그 뒤로 상민이 뭐라고 했지만, 듣지도 않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에서 여전히 잊히지 않는 그의 다정한 말투가 생각나 결국 자리를 박차고, 그의 집 앞으로 갔다. 이제라도 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간절한 마음은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더욱 커졌다. 드디어 집 앞에 도착해서는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그런 분 없는데요.”
“아니에요. 여기 오빠 집 맞는데!”
“여긴 학생이 오빠라고 불릴 만큼 젊은 사람 안 살아요.”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 상민의 제일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기, 저 진인 데요. 혹시 상민 오빠 이사 갔어요?”
그의 친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난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해줄게.”
“뭘요?”
“상민이 아버지,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지금 병원에 있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지금 입원 중이셔. 상민이한테 아버지가 유일한 가족이잖아. 아버지 병원비 댄다고 집 팔고, 지금 병원에서 지내. 네가 상민이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걔 제대로 밥도 못 먹어서 살이 쭉쭉 빠지고 있어.”
“몰, 몰랐어요. 고, 고마워요.”
“병원 주소 문자로….”
무슨 정신으로 병원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상민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뛰었다. 곧장 상민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얇은 운동복 차림으로 아버님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그 사이에 아버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말도 못 해 상민과 눈으로 대화했고, 식사는 코와 연결된 관으로 하고 있었다. 정말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민 오빠!”
진의 목소리를 들은 상민은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미안했다. 그러나 진은 오히려 그런 그를 뒤에서 꼭 안았다. 6인실 병실에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커튼을 쳤다.
“고작 이런 일로 나 찬 거야? 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았어?”
“아니야, 널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어. 넌 행복해야 하니까.”
“오빠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어?”
그도 마찬가지였다. 진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았다. 고작 이틀 그녀와 헤어졌는데, 종일 후회하고 후회했다.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간절함 뒤로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또 자책했다. 그런데 오늘 그녀를 만났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다시 만난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미….”
“그래, 됐어. 거기까지만 해. 사과하지 마. 우리에게 어제와 오늘은 없던 일이야.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오빠도 아무 말 안 한 거야. 잊어. 오빠가 후회한 만큼 더 나 사랑해 줘. 그러면 돼.”
바보처럼 착한 그녀 덕분에 행복했다. 한 번의 말실수로 잃을 뻔했던 가장 큰 보물을 다시 찾아서 다행이었다.
작성일 : 2024년 11월 12일
출판사 : 포레스트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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