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은행, 병원, 관공서는 물론 가전제품 회사의 서비스 센터에 이르기까지 순서를 기다리기 위한 대기 번호표가 일반화되어있다. 업무를 보려면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대기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창구가 비게 되면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번호가 나오면서 ‘00번 고객님 0번 창구로 오십시오.’라는 멘트가 나온다. 어떤 곳에서는 그냥 ‘딩동’ 소리만 나오는 곳도 있다. 소리가 나면 조건 반사로 창구 쪽을 쳐다보게 된다. 일부 유명 커피점이나 페스트푸드 점에서는 진동벨 대신 종업원이 ‘00번 고객님, 00 나왔습니다’를 외친다. 이 경우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번호를 부르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279번 고객님, 음식 나왔습니다.’ 언젠가 여행 중에 혼자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항상 그랬듯이 번호표를 주고 음식을 받았다. ‘279번?’ 사람에게 이렇게 번호를 붙여야 하나? 고객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279번 고객님’보다는 한 음절만 더 추가해서 ‘279번째 고객님’이라고 하면 어떨까. 번호가 표시되는 은행이나, 유명 커피점이나, 이 휴게소 식당에서도 말이다. 편리를 위해 번호를 매겨야 한다면 방문한 순서대로 사람에게 번호를 매기는 것보다는 방문한 순서 그 자체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279번 고객님’과 ‘279번째 고객님’은 의미가 매우 다르다. 나는 번호가 279번인 사람이 아니고, 279번째로 방문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1968년에 시작, 사회생활 어디라도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는 주민등록번호. 사실, 이 주민등록번호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별 유쾌하지 않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지역이 표시된 개인식별번호로서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공산품 시리얼 넘버와 같다. 생산품의 시리얼 넘버만 보면 생산공장, 생산기계, 생산일자를 알 수 있어 문제 해결을 위한 역추적이 가능하다. 주민등록번호는 사람에게 부여된 시리얼 넘버다. 실제로 새터민에게 주어진 주민등록번호의 지역 번호가 새터민 모두에게 같게 부여됨으로 인해 번호만 보면 새터민임 금방 알 수 있어 중국 비자가 거부되거나 국내 정착에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2020년 10월에 주민등록번호체계가 바뀌어 지역 번호가 폐지되었지만, 사람에게 번호를 부여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개인 정보가 모두 들어 있고 무엇을 하던 꼭 필요한 주민등록번호. 언젠가 대형 시중은행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 큰 문제가 되어 지금은 일부를 제외한 본인 확인에는 생년월일만 사용하도록 바뀌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에는 주민등록번호가 그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난해 봄의 마스크 대란 시에는 주민등록번호로 정해진 요일에만 주 1회 구매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중복 구매를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은 백신 예약도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여 예약한다. 편리 혹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으나 그만큼 모든 부분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주민등록번호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편리성이 있는 반면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나, 악의로 사용되었을 경우 그 위험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어 양날의 칼과 같다.
일본에서는 2016년부터 ‘마이넘버(my number)’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로봇처럼 번호를 붙인다며 엄청난 반대 속에 겨우 시작되었는데,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작년 7월 기준, 마이넘버 카드 보급률은 17.5%로 아주 저조한 실적이다. 이러다 보니 코로나의 대응이 엉망이다. 마이넘버가 있으면 1인당 10만 엔(우리 돈 약 105만 원)의 소비장려금을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지만, 마이넘버가 없으면 우편으로 각 가정에 서류를 보내고 회수를 한 후 현금을 지급해야 하므로 6개월이나 걸렸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행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라면 며칠 안에 끝낼 일인데, 이것 역시 번호가 가진 명암이다.
지금 세상은 숫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사람에게 그냥 숫자를 붙이는 것이 아닌 인간미가 가미된 숫자와 함께하고 싶다. 나는 ‘279번 고객님’이 아닌 ‘279번째 고객님’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