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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Oct 21. 2020

고양잇과 여자들의 교토 벚꽃 산책

고양이의 보폭으로 친구가 되고, 여행을 한다





나는 고양이 같은 사람이 좋다

 바리스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첫 해, 한 환경단체의 자원봉사 모임에서였다. 아이들을 좋아하던 그녀는 어린이 캠프 같은 것들을 곧잘 기획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녀가 멀게 느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만'멀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양이 같은 인간. 강아지가 아니었다. 사람들 틈에 어울려 뛰어 놀기보단 볕 좋은 곳에 드러누워 등 따시게 낮잠이나 자고 싶었다.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나를 외향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형이었다.


 그녀를 가까이하게 된 건, 그녀도 나처럼 고양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친구들끼리 이년 저년 하면서 허물없는 우정을 쌓아가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고양잇과 여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여자 친구들끼리 흔히 오가는 "화장실 같이 갈래?" 하는 말에서 소속감을 느끼거나 안도하지 않았고, 여왕벌이 되어 무리의 우러름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다. 문자 답장이 없으면 "지금은 누군가와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생각하며 연락을 재촉하지 않았고, 동굴에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동하면 꼬리를 높게 들고 서로를 찾았다. 누군가 성장통에 힘들어할 때면, 말없이 곁에 앉아 고르릉 소리를 냈다.


 고양이를 키우며 위안을 받는 순간이 있다. 폭풍 애교와 개인기로 나를 즐겁게 해 주지는 않지만, 가만히 다가와 온기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때다. 그녀와 보낸 지난 10여 년이 그랬다.






두 고양이를 이어 준 봄날의 교토

 우리는 같은 여행 책을 읽고 같은 대목에 감동받으면서도 선뜻 여행을 함께 떠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첫 해외여행을 절교 여행으로 장식한 화려한 이력이 있었기에, 절교 경력이 또 한 줄 늘어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때문에 여행만큼은 언제나 따로 다녔다. 단, 서로의 여행기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아오다 문득, 봄의 교토가 우리를 끌어당겼다.

 봄날에, 꽃을 보면서, 산책을 하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육아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를 하고 싶던 참이었다.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그녀와의 여행을 한 번쯤 시도해보자는 마음이 차올랐다.


 두 고양이는 아라시야마의 봄으로 산책을 떠났다.


 3월의 끝. 긴 겨울을 깨고 피어난 아라시야마의 생기란! 웅크렸던 어깨에 사르르 긴장이 풀렸다.

 골목 모퉁이 헌책방 주인은 시원스레 창문을 열었다. 창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낡은 책들을 따끈하게 데웠다.

책방을 기웃거리다 <고양이 고양이 열 마리 고양이 ねこねこ10 ぴきのねこ>라는 이름의 동화책을 샀다. 고양잇과 여자들의 교토를 기념하기 위해.

 

 책을 안고, 봄 꽃나무 아래 생글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었다.

 꽃잎 흩날리는 옛 길 위엔 인력거가 오가고 강에는 나룻배가 떠 있었다. 아라시야마에는 천 년 전 귀족들의 휴양지다운 특유의 우미함이 있었다.

몇백 년 묵은 오랜 집들 사이에 감각적인 상점과 찻집이 생겨나 하나의 풍경을 그렸다. 그 사이사이를 아기자기한 소품과 예술 작품들이 장식했다.

 걸어서 보아야 아름다운 곳이 교토였다. 너무 총총대지도 굼뜨지도 않게, 고양이의 산책처럼 적당한 보폭으로.






결혼이, 남편이, 아이가 채울 수 없는 틈

 교토를 걷는 내내 그녀를 처음 만난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왜 여태껏 함께 여행하지 않았나 하는 50퍼센트의 후회와, 지금이라도 같이 다니니 좋다는 50퍼센트의 기쁨을 느꼈다.


"야, 니는 그때가 좋나 지금이 좋나?"

"그때도 좋긴 한데 지금이 낫다."


 '그때'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이. 우리는 편집되지 않은 서로의 역사를 공유했다. 성취, 실패, 희망, 고민, 갈망의 변천사를 연도별로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더하고 뺄 이야기도 없었다.

 아무리 사이좋은 가족이라 해도, 남편이나 아이가 채워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다. 그것은 또래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영역에 누군가를 들이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30대 이후의 우정에는 너무 많은 외적 요건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처지가 너무 다르면 안 되고, 먹고사는 모양새가 비슷해야 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 하나가 앞서거나 뒤쳐지면 우정보다 상실감이 커진다고 했다.

 한 때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다 한들 사는 곳이 멀어지면 관계 유지가 힘들어진다고도 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은 '지금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친구의 새로운 정의가 된다는 것이었다.

 자랑스러운 일이나 기쁨만을 내보여서는 안 되고, 속상한 일을 허물없이 털어놓되 입이 싼 사람한테는 해선 안 된다. 하소연의 정도가 과한 것도 금물이라 했다. 상대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 때문이다.

 대화의 소재도 중요했다. 정치나 종교 같은 예민한 주제는 피하고, 입을 모아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만한 내용이 무난하다고 했다.


 아.

친구가 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이런 요소에 짓눌리지 않고 '그냥' 막역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걸까. 열 살 때, 스무 살 때 그랬던 것처럼.

토라지고, 샘을 내고, 화해했다가도 다시 입을 삐죽이는 시간이 쌓여 탄생하는 것이 우정일 지도 모른다. 남편도, 아이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라는 자리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이어진다.






결혼 생활도 코냥이처럼

 그녀와의 봄 산책을 기분 좋게 끝마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이제 다시 엄마로 돌아갈 시간이다.

한달음에 달려온 우리 집. "우리 아기 어디 있지? 엄마 왔지요~" 너스레를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에게 고양이 동화책을 건넸다. 남편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 읽어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분 후 아이 독서 기록장에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인 남편은, 책 제목을 굳이 한국어로 기록하겠다고 골똘히 궁리하다 연필을 든다.


십말리 코냥이


"마릿수를 셀 때는 십이 아니고 '열'을 쓰는 거야."

내 말에 남편은 부랴부랴 책 제목을 고쳐 쓴다.


욜말리 코냥이


남편아 이게 웬 한글 파괴니.

서툴긴 하지만, 어떻게든 한글을 써보려는 의지가 귀여워 봐주기로 한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동화책을 들추어보고, 그녀와 함께한 교토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결혼은 고양이들의 영역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누구에게나, 가정을 꾸렸다고 해서 빼앗거나 빼앗길 수 없는 일정한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양이란 동물은 희한하다. 잡으려고 하면 기를 쓰고 도망가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슬그머니 다가온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서로를 손아귀에 넣고 힘을 주려 하면 할수록 상대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어 온 몸을 비틀게 마련. 손에 힘을 빼는 것이 관계를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다.


 남편은 나를 교토에 가도록 놓아두었고, 나는 친구 고양이와 이 동네 저 동네를 얌전히 기웃거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려 준 남편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뺨을 비볐다. 

믿는 마음으로 내버려 두면, 제 발로 알아서 걸어 들어와 품에 안기게 되어 있다.






부산 고양이와 나고야 고양이, 교토에서 접선하다


고양이들은 교토의 봄에 반하고 마는데...


아기 고양이를 기르느라 영혼이 털려가던 나고야 고양이는 제정신을 되찾았다.


교토 헌책방에서 산 <고양이 고양이 열 마리 고양이>는 '욜말리 코냥이'가 되었다.


고양이 얘기 나온 김에 우리 집 고양이도 구경하세요. 항아리 아니고요. 오뚝이 아니고요. 고양이입니다


17살 먹은 자매예요. 아직 건강합니다. 장수 고양이라 불러주세요 ㅎㅎㅎ


자식 자랑보다 더 재밌는 고양이 자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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