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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 없는 아이 그리고 엄마

그렇다면 남편 꿈은?

by 최민지

작년 봄 시드니에서 후배님을 만났을 때. 후배님은 시뽀에게 "너는 장래희망이 뭐야?" 하고 물었다. 최시뽀는 그전에도 유치원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되고 싶은 게 없는데 자꾸 뭘 말하라고 하는 게 성가셔서 대충 '경찰'이라고 둘러댔다나.


그래도 시드니에서는 제법 성실하게 답했다. "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울 거야. 그리고 바다에서 낚시해서 잡은 생선으로 고양이 밥을 줄 거야." 하고.

고양이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스코티시 폴드, 또 한 마리는 삼색이, 나머지 한 마리는 뭐라고 했더라. 아무튼 참으로 시뽀다우면서도 귀여운 장래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올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어김없이 참관수업이 열렸다. 몇 분 일찍 가서 교실 구석구석을 둘러보는데, 뒷벽에 딱 붙은 사물함 위로 아이들의 올해 목표며 장래희망이 쓰인 종이가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적힌 최시뽀의 장래희망은 '없음'. 때에 따라 대충 둘러대 보기도 하고 성실하게 답해보기도 했지만 시뽀의 진짜 속마음은 '그런 거 없는데요'가 아니었을까.

장래희망이 없다니. 으하하. 과연 핫서방과 나의 자식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핫서방도 그리고 대부분의 어른들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초등학교 3학년이 장래희망이 있다 한들 그대로만 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며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어떤 하나의 직업을 정함으로써 내일을 상상하는 문까지 닫지 말고, 열린 문 사이로 오색 빛깔 향기와 저 멀리서 불어오는 새 바람이 드나들기를 바랄 테니까.





마침 나도 요즘 들어 비슷한 생각을 했다. 설사 어린 시절의 내 꿈이 일본어를 전공해 일본에 사는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뜻한 대로 순순히 이루어졌을 리는 없다고.

중간에 다른 일을 하고 싶어졌을 수도 있고,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이 삐걱댔을지도 모르며, 막상 살아보니 일본이 별로라고 느껴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장래희망이란 막연한 환상과 같아서 실제로 그 일이 현실이 되자마자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전교생을 모아 놓고 '일본에 무관심한 순'으로 정렬하면 맨 첫 번째 자리에 섰을 내가 여기 아주 눌러앉았으니 이 얼마나 뜬금없는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도서관에 가서 제일 먼저 한다는 일이 3층 [일본문학연구] 서가로 향하는 일이며, 읽어내지도 못할 옛 텍스트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파고들 때. "내가 무슨 일어일문학과 출신도 아니고, 전혀 이쪽이 아니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하는 생각이 든다.

킷사텐 책을 준비하던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런 생활도 벌써 3년째임에도 아직도, 여전히, 어이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뜬금없는 전개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 정한 장래희망을 이정표 삼아 하나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삶도 멋있지만, 그때그때 주어지는 삶 안에서 내가 나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스스로가 할만한 일을 찾아 이끄는 것. 새로이 주어진 날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있는 힘껏 살아내고 있다면 이것 역시 좋지 않은가.








확고한 장래희망과 인생 계획이 있었다면 나는 스스로가 정한 경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핫서방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삶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나는 여행길에서도 저 목적지로 가려다 늘 샛길로 새는 인간. 원래 가려던 데보다 샛길이 더 예쁘면 금세 만족해하는, 원래도 좀 모자란 사람이다.


인생에 새로 나타난 강렬한 등장인물을 따라, 이전에는 없었던 관심사를 따라. 새 길이 보이면 거기도 한번 밟아 보는 유연함(?)이 만들어준 것이 나의 오늘.

그랬더니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하나의 일을 해내고 나면 저쪽에서 웬 문이 하나 열리면서 "여기로 오세요!" 하고 나를 부른다.


다음 스테이지에 들어가면 또 다시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미션과 함께 조력자와 방해자가 고루 주어진다. 얼렁뚱땅 그러나 온 힘을 다해 해내고 나면 "어? 이번에도 됐네? 그럼 다음 단계는 뭐지?"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그러니 다음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나에게 먼 미래를 가리키며, "당신은 장래희망이 뭔가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냥 시뽀처럼 '없음'을 적어내지 않을까. 10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의 나는 10년 후의 나를 미리 결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뽀의 장래희망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기도 한다.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고양이 세 마리에게 밥을 주는 삶. 가능하지 않을까?

얘기가 나온 김에 남편에게도 물었다.

"너는 장래희망이 뭐야?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핫서방이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답했다.

"나는, 예전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뭔데?"

"바닷가에 구멍가게를 내고 튜브를 파는 일이야!"


아들은 바다에서 낚시해서 고양이 세 마리 밥 주고, 아빠는 튜브 장수를 하겠다니.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캣대디의 엄마이자 튜브 장수의 아내가 되는 건가.


질문이 무색할 만큼 천진난만한 두 사람을 보며 웃어버렸다. 우리 집구석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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