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등교 거부가 우리 집 얘기가 될 줄이야!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1학년 1학기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등교 거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아이가 등교를 거부했다! 특히 5월 한 달은 아침마다 구슬프게 울고 현관에서 머뭇거리며 발을 떼지 못했다.
아이는 상냥하고 사교적이라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격이다. 그래서 막연히, 입학하면서 환경이 바뀌는 것이나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일에 대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등교 거부'가 우리 집 일이 될 줄이야.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는 이유는 선생님이 무서워서라고 했다. 매일매일 혼나서 학교가 즐겁지 않다나. 별 수 있나. 남편은 아침마다 우는 아이 손을 잡고 등굣길을 함께했다.
학교에 따라 예외도 있겠으나 보통의 일본 초등학교는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학교에 태워주는 것을 자제해 주기를 부탁하고, 가까운 곳에 사는 어린이들을 묶어 그룹으로 등교할 수 있게끔 한다. 고학년이 저학년을 보살피고, 그 저학년이 선배가 되면 새로운 1학년을 보살피며 가는 것이다. 정해진 통학로만을 걷게 되어 있어서 그 길을 따라 교통 자원봉사자가 배치된다.
여기에 대한 의견은 보호자마다 다르겠으나 나는 만족하는 입장이다. 1) 학교 앞 차량 통행량 자체가 적으니 교통사고에 대한 염려도 줄고 2) 학교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교통정체와 같은 불편을 겪게 하지 않으며 3) 등하교라는 일을 해내는 방식이 공동체적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하굣길은 고학년 누나 형이 함께할 수는 없지만, 이 학교의 경우엔 은퇴한 경찰들이 지역사회에 재고용되어 저학년 하교를 도와주신다. 이렇게 최대한 아이들 자력으로 해낼 수 있게 되어 있는 등굣길을 우리는 5월 내내 따라다녔다. 그 길 내내 아이는 울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환영 인사를 해주는 선생님들도 최시뽀가 담임선생님 무서워서 울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핫서방 사연을 듣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아버님이 매일 학교에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였고, 그 후로 담임선생님의 아이 칭찬이 늘었으며 상담교사와 담임교사, 아이의 삼자대면이 있었다. 그 상담에서 아이는 "나도 힘내서 학교에 올 테니, 선생님도 우리를 무섭지 않게 대하도록 힘내 주세요."라고 말했단다. 헉... 그런 말을 하다니! 패기의 1학년이다.
아이 본인이 자기 나름의 의사를 전달했으니, 핫서방과 나는 당분간 학교 측과는 그 정도로만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마다 아이들 대하는 방법이 다 다른 법. 모든 선생님이 언제나 친절한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무서운 선생님이 나쁜 선생님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남편과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무서워도 가르칠 것을 가르친다면 좋은 선생님이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로 우려해야 하는 것은, 무섭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꼭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칠 수 없는 경우다. 핫서방과 나는 선생님을 문제 삼아 즉각 대응하기보다는, 최시뽀가 학교에 가기 싫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등교거부 사건에서 나를 가장 난처하게 한 것은 아이의 거부 그 자체가 아니라 엄마들의 라인 LINE 대화방이었다. 학기 초 입학식과 참관수업 때 몇몇 엄마들과 라인을 교환했었는데, 최시뽀가 학교 가는 걸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엄마 둘이 라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 아이도 선생님께 혼났다고 해요. 1학년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왜 무서운 선생님을 1학년 담임으로 했을까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선생님 같아요."
"선배 엄마들이 그러는데, 담임에 대한 불만은 바로 교무부장한테 가서 상담하는 게 좋대요."
처음엔 아이 걱정으로 시작된 대화방은 날마다 점입가경이었다. 며칠쯤 지나자 선생님을 습관적으로 험담하는듯한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그 메시지들을 읽다 보면 선생님이 대단한 폭력을 휘두르는 교사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이 진짜 잘못된 건지 아닌지 성급히 판단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혼났다. 학교 가기 싫다."라고 했다는 정보만으로 선생님을 문제 교사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나는 학폭이나 이지메 같은 문제에 있어서도 언제나 최시뽀의 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보호자들이 "우리 아이가 학폭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나 역시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가해자]일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다" 하는 무한한 믿음이 오히려 내 아이를 가해자로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학폭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 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 잘못은 없는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 선생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맥락에서, 남편과 나는 최시뽀가 혼날 이유가 있어서 혼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보았다! 운동회날 다른 학년 경기 중에 최시뽀가 자기 수건을 펴서 친구들과 줄다리기를 하고, 수건 높이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을! 그러다 몇 번이나 넘어져 의자가 뒹구는 것을!
이럴 때 선생님이 "그런 위험한 행동은 하면 안 된다" 하고 따끔하게 주의를 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 행동을 바로잡지 않으면 중고등학교에 가서까지 민폐 학생이 될지도 모른다. 회전 초밥집에서 공용 간장 병을 핥으며 즐거워하는 어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당장은 혼나는 아이가 가여워 보이겠지만, 정말로 가여운 것은 혼나야 할 때 혼나지 못하고 민폐 어른이 된 이들의 삶이다.
게다가 최시뽀는 핫서방 같은 면이 있어서, 어딘가에 가기 전에는 세상 귀찮아하다가도 막상 가면 제일 잘 놀고 오는 특징이 있다. 유치원 때도 그랬다. 귀찮아서 가기 싫다고 하다가도, 막상 등원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지느러미를 신나게 나불대던(?) 어린이였던 것이다. 학교도 등교는 울면서 해도 하교는 웃으면서 하는데, 학교가 정말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애가 저렇게 멀쩡하고 해맑을 수 없다.
결정적으로 최시뽀는 5월 골든위크 직후 40도의 고열을 동반한 감기에 걸려 4일 동안 결석하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동안 결석의 달콤함을 맛본 거다. "아파서 결석해 보니 편하고 좋더라. 또 학교 안 가고 집에서 놀고 싶다. 선생님이 좀 무섭던데. 그 핑계를 대보자."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매일매일 울려대는 라인 메시지가 점점 불편해졌다. 설령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뒤에서 선생님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 그 메시지들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생각을 최대한 명확하고 확실하게 전해 두어야 다른 보호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험담을 듣는 데에 쓰이는 비생산적인 시간을 다른 유익한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험담의 대상자가 내가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패턴의 대화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않으면 등장인물만 바뀐 다른 이야기판에 자꾸만 초대될 것이니까. 이것도 1학년 때 빨리 빠져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이 학교생활 내내 저런 식의 대화를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될 것 같았다.
라인 대화방의 열기와는 달리 남편은 굉장히 침착한 자세를 보였다. 자기도 그런 어린이였기에 아이 마음을 알겠다는 거다. 가기 싫어해도 같이 가주고, 계속 가다 보면 또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는 게 핫서방 의견. 어른도 회사에 가기 싫을 때가 있는 것처럼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싫다고 해서 간단히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주변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폭언이나 폭력과 같은 중대한 잘못을 하지 않은 한, 다양한 선생님을 접해보는 경험도 필요하다고도 했다. 유치원 때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어리고 예쁘고 상냥한 여선생님들로, "저분이 왜 아이돌을 안 하고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을까?" 싶은 분들이었으니 아이 입장에서는 학교 선생님의 엄한 지도가 더 낯설 법도 하다.
그렇게 한 달.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엄마들이 단체 대화방에서 해준 조언이 아닌 같은 등교 그룹 아이들을 통해서 풀렸다.
학교 가기 싫다고 통곡하는 시뽀를 본 6학년 형아는 "나도 1학년 때는 학교 가기 싫다고 많이 울어서 엄마가 1년 내내 학교에 데려다줬어."라고 고백했다. 아니 저렇게 듬직하고 멋진 형도 1학년 땐 엄마 손잡고 학교를 다녔단 말이야? 아이도 나도 눈이 동그래졌다.
4학년 형아는 "나도 일요일에 학원 가기 싫어서 울었다? 그래도 같이 가보자. 너는 무슨 포켓몬 좋아한다고 했지?"라고 하며 등교 토크를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형들의 그런 말이 먹힌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과 아이의 상담이 먹힌 것인지. 한동안 등교를 거부하던 최시뽀는 지난달부터는 울지 않고 학교에 간다. 핫서방은 학교가 '옆으로부터의 배움 横からの学び'을 위해서 가는 것도 있다고, 선생님이나 부모 같은 어른이 아닌 친구나 선배 등 수평적인 관계에서 얻는 것이 많을 거라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보호자인 우리가 해주지 못하는 것을 선배 형들이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등교 출발시간 잘 지켰네? 힘내서 나왔구나. 대단해!" 하는 형들의 말 한마디가 핫서방이나 내가 하는 격려보다 나을 때가 많다.
최시뽀가 학교에 입학한 후로 우리 셋은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이고, 왜 가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어 왔다. 핫서방과 나는 "공부도 공부겠지만, 학교는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고 경험하면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을 하며 함께 고개를 끄덕였었다.
무서운 선생님, 상냥한 선생님, 닮고 싶을 만큼 현명한 선배 학부모, 묘하게 험담을 걸어오는 학부모, 함께 등교하는 주변 아이들까지. 우리는 벌써 새로운 사람들을 다양하게도 만났다.
누가 꼭 좋거나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님도, 보호자도, 나와 남편도, 우리 아이도 어딘가 모나고 부족한 인간이다. 좋은 인간도 어떤 면에서는 나쁘고, 나쁜 인간도 어떤 면에서는 좋은 인간이다.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고 여러 가지 사건에 대응하면서, 최시뽀도 인간 사회 속에서 다른 인간을 대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을 쌓아가면 좋겠다.
등교 거부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친구 관계 문제라는 새로운 과제가 생겨났지만 이 문제 역시 '다른 인간을 대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느새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는 7월.
학기는 끝나가지만 학교생활은 이제 시작이다.
장마와 폭염과 태풍을 거치며 우리도 더 단단해졌으면.
가을에 맞을 새 학기엔 좀 더 의젓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2022년 1월
새로운 개인주의 사용설명서
<이럴 거면 혼자 살라고 말하는 당신에게>를 출간했습니다
배우자, 자녀, 원가족, 이웃, 친구, 동료.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라는 개인을 지키면서도, '너'라는 개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개인주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6174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