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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Sep 22. 2020

뭉크를 만나기 위해 노르웨이에 갔다

아가, 엄마 소원 좀 이루고 올게




미술 수행평가가 나에게 미친 영향

 <절규>의 화가 뭉크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미술 수업을 통해서였다. 

 선생님은 신선한 수행평가를 많이 내어 주셨다. 미래의 내 명함 디자인하기, 내 방에 두고 싶은 조명 그리기 같은 것들이었다. 

뻔한 수채화와 정물화, 소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애들이 재수 없다고 할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다음 수행평가가 무엇일지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중 하나는 미술가의 생애를 라디오 드라마로 만드는 과제. 반에서 마음이 제일 잘 맞는 친구들과 조를 짰다. 다른 조와 겹치지 않으면서도 삶이 드라마틱한 예술가를 찾아야 했다. 곧바로 정답이 나왔다. 답은 '에드바르트 뭉크'였다. 


 무릇 드라마란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어야지만 탄생한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무런 굴곡 없이 '행복하게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 갔습니다'라고 시작해 끝나버리는 이야기는 결코 드라마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뭉크의 삶에는 그 어떤 드라마 주인공보다 가슴 아린 사건이 많았다. 


 스스로를 병마와 죽음 곁에서 자라왔다고 회고한 화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누나에게 의지하며 자랐지만 머지않아 누나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이상 성격자였다. 

뭉크는 깊은 슬픔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살고자 했지만 아버지는 의사가 되라고 강요했다. 반대를 무릅쓴 끝에 화가가 되었으나, 작품세계가 기존 예술계와 달라 뭇매를 맞으며 살았다.


 사회적 통념을 따르지 않았던 뭉크는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여성들을 사랑했다. 

그녀들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팜므파탈이기도, 가정이 있는 유부녀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총을 들고 협박한 연인도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빗나간 총알은 뭉크의 손에 꽂혔다.  

 그는 단 한 번의 결혼도 하지 않았고 후손도 없다. 그의 그림 속에서 여성은 어린 날에 사랑했던 어머니이자 누나였고, 흡혈귀이자 메두사였다.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 그것이 내 고민이 될 정도로 감정 이입이 극심한 나는 그의 삶에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뭉크는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을까? 그가 보았다는 자연의 절규는 무엇일까?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뭉크 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는데 거긴 어떻게 생겼을까?

 어른이 되어 외국이라는 곳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노르웨이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른이 되도록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눈 앞에 닥친 일을 쳐내며 살기에도 벅찼기에 고등학교 시절의 꿈이나 이역만리 타국 화가의 삶 같은 것은 곱씹을 겨를이 없었다. 

 더군다나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 순위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을 차지했으니, 가고 싶다고 쉽게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소녀시절의 꿈은 그렇게 쉽게 잊혀가는 듯했다.




65만 원짜리 비행기표가 나를 그곳에 데려가 주었네

 우습게도 그 꿈을 실현시켜준 것은 항공 특가였다. 

 한 항공사가 프로모션을 열어 오슬로 노선을 왕복 65만 원에 판매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 표를 안 사는 건 손해였다. 그것도 엄청난, 일생의, 역대급 손해.


 일단 발권을 했다. 그런 다음 남편에게 <내가 노르웨이에 가야 하는 101가지 이유>를 늘어놓았다. 

내 일장연설을 귀엽게 본 남편은 꼭 다녀오라고 응원해주었고, 아이는 "기념품으로 장난감 사 오세요"라는 말로 엄마의 휴가를 허락했다. 

잊고 지내던 소원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당연히 뭉크 미술관이었다. 

 뭉크는 80살이 넘게 장수했고, 주로 판화 작업을 했기 때문에 남긴 작품이 아주 많은 화가에 속한다. 그는 작품과 소장품 28,000점을 오슬로시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은 방대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작품을 보아야만 했다! 오슬로에서 꼭 가야 할 곳 1순위는 자연스레 뭉크 미술관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목적지였다.


 미술관을 찾아가는 여정은 뭉크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학창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구글 맵스에 '뭉크 미술관'을 찍고 걷는 동안, 좋아하는 화가와 갖고 싶은 명함이 있던 날들을 마음속에 소환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왜일까? 어른이 되면서 내 욕망에 남의 욕망과 사회적 욕망이 덧칠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도 어플에 정확한 목적지를 입력해야만 그곳에 닿을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에게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욕망이라는 엉뚱한 곳에 도착하고 말 테니까.


 이번 목적지는 정확했다. 미술관에 도착한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진동하는 커다란 울림이 증거였다.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뭉크미술관은 2020년 여름 새로운 터전으로 이전하는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전시는 대폭 축소되어 최소한의 작품만 공개되고 있었다. 뭉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절규>도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새로운 뭉크 미술관에도 갈 테니까. 

죽기 전에 두 미술관 모두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뭉크는 정말로 예술을 모독했을까

 <절규>를 대신해 공개된 작품은 뭉크의 또 다른 기념비적인 작품, <마돈나>였다. 

마돈나는 여성의 황홀과 수태의 순간을 그려 낸 것으로 에로티시즘이 강조된 그림이다. 뭉크는 이 작품을 여러 차례 반복해 그렸는데, 정자가 그림 모서리를 액자처럼 감싼 더욱 노골적인 버전도 있다.

 

뭉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세간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더 이상 실내와 독서하고 뜨개질하는 부인들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렇다. 선배 세대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박제된 듯한 여성을 그려 왔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뭉크의 그림은 사회에 내미는 도전장과도 같았다. 지금 시대에 그려진 작품이라 해도 외설이냐 예술이냐의 문제로 말이 많을 소재인데 당대엔 어떠했으랴.

 "뭉크 그림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라는 모진 평가가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파장을 일으켰고,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림이 오만방자하다는 이유로 베를린에서 열리기로 한 전시회가 취소된 일도 있었다.

 만약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베를린은 근처에도 안 갔을 것이다. 하지만 뭉크는 숨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베를린에 눌러앉아 더 적극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나와 달랐다. 남의 욕망이나 사회적 욕망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그렸다. 

그 결과, 전 세계 어딜 가도 <절규>의 화가 뭉크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대가 왔다.


 만약 그가 당대의 화풍에 순응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술의 새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의 다양성은 반감됐을 것이다. 어쩌면 이 미술관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났다. 겨울 묘지에 잠든 뭉크를. 

 미술관을 뒤로 하고, 오슬로 곳곳에 깃든 뭉크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그의 향취가 있었다.


 대표적인 장소가 그랑 카페 Grand Café. 노르웨이 사상가와 예술가 모임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Kristiania Bohemians'의 아지트로, 뭉크와 친구들이 진보적인 생각을 나누던 교류의 장이었다고 했다. 

 이제 그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카페 내부도 리모델링을 거치며 달라졌지만 그들이 함께하는 모습은 그림이 되어 카페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천천히 식사를 하며 같은 장소 다른 시대의 오슬로와 뭉크를 상상했다. 


 나뭇잎마저 얼어붙은 어느 아침에는 뭉크가 잠들어있는 '우리의 구세주 공동묘지'로 향했다. 그간 숱한 나라와 숱한 도시를 여행했지만 공동묘지에 찾아가기는 처음이었다.


 묘지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뭉크의 삶이 마지막까지 평탄치 않았다는 것이다.

 1944년, 뭉크는 영면을 맞이했지만 고인에겐 가족이 없었다. 유골함은 사후 16년간 화장터 서랍에 방치되었다. 뭉크의 행방을 찾던 기자가 뒤늦게서야 유골함을 발견해 공동묘지에 안치했다. 

 2020년, 뭉크의 자리는 비탈진 그늘에 마련되어 있었다. 비석 뒤엔 그의 생전 모습을 새긴 흉상이 보였다. 

이마저도 최근에야 세워졌다고 하니, 양지바른 곳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입센 가문 묘지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다. 


 잠든 뭉크 곁을 서성였다.

 한동안 묘지를 마주 보다 문득 몸을 틀었다. 묘지를 등지니 오슬로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뭉크 흉상이 보고 있는 풍경을 함께 보았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마침내 그의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그도 나를 친구로 생각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수행평가 결말, 수정해도 될까요 

 공동묘지를 나와 오슬로 시내를 정처 없이 걸었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뭉크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생의 불안과 고독을 노래한 그가 불행했을 것이라 한다. 나 역시 과거의 수행평가에서 그의 삶을 불행으로 묘사하며 드라마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해서, 고독하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안과 고독과 행복 모두가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공평한 요소라는 걸 서른이 넘은 나는 안다. 


 뭉크의 발자취를 따라 밟는 동안, 나는 왠지 그가 행복했을 것이라 믿고 싶어 졌다. 평범하지도 평탄하지도 않았지만 그토록 원하던 예술가로서 살다 갔기 때문이다.

 뭉크는 일생동안 그림과 글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어 했다. 80년 평생을 무엇이라도 그리거나 쓰지 않으면 당장 죽기라도 할 것처럼 내면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이 정도로 예술이 천직인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사가 되고, 정략결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았더라면? 남 보기엔 그럴싸하고 번듯해 보였을지 몰라도 본인은 누구보다 불행했을 것이다.


 삶이란 결국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고, 그는 그렇게 했다. 


 생각의 끝이 이런 결론에 닿았을 때

오슬로 하늘은 <절규>의 한 장면처럼 붉게 타올랐다. 

 



 

뭉크의 <절규>는 자연의 절규를 들은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오슬로에서 석양을 본 날, 그 뜻을 이해하게 됐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뭉크 미술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뭉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그랑 카페, 오슬로 시청, 칼 요한 거리.


1944년 생을 마감하고 우리의 구세주 공동묘지에 잠든 뭉크.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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