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렀던 나의 상하이에 다시 갑니다
그랬다. 나는 우정여행을 떠났지만 절교 여행을 하고 왔다.
처음부터 그러려 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들 친구와 절교하고 싶겠는가? 그것도 함께 여행을 갈 정도로 가까운 친구와 말이다. 우리는 그저, 서툴렀을 뿐이었다.
2006년, 대학생이 된 해였다.
수험 생활을 <지리부도> 보며 공상하는 낙으로 버텨온 나는 책에서만 보던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가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가고 싶던 나라는 세 곳. 중국, 노르웨이, 브라질이었다.
외국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나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노르웨이와 브라질에 불쑥 찾아가기엔 겁이 많았다. 그래서 결정한 내 첫 해외여행지는 상하이였다.
외국이지만 같은 문화권이니 이질감이 덜할 테고, 김해공항에서 직항 편이 있는 가까운 도시인 데다가,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운 덕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될 거란 예상에서였다.
여행경비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반을 충당하고 남은 절반은 부모님께서 보태어 주시기로 했다. 시급 3650원. 여행을 가기 위해 열심히 피자를 팔았다.
경비가 마련되자 서점에 달려가 생애 첫 가이드북을 샀다. 앉으나 서나 가이드북을 끼고 살며 신나게 일정을 짰다.
그렇게 매일매일 상하이 여행을 상상하며 보내던 어느 날, 친구 두 명이 동행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한 명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랜 친구였다. 함께 한 시간이 길었기에 나를 제일 잘 알아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다른 한 명은 중학교 때 전학을 가서 언제나 그립고 보고 싶은 친구였다. 그런 친구들과의 여행이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첫 해외여행이었다. 다 같이 한 비행기에 올라 붕 떠오르던 때까지만 해도 완벽했다. 우리의 우정과 여행은 이대로 쭉 상승 곡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이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상하이에 도착한 순간 모든 것은 지하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첫 해외여행인데 얼떨결에 가이드가 됐다. 여행의 최초 기획자가 나였기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크게 의지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고, 서툰 의사소통을 하는 모든 것이 내 몫이었다. 버거웠다.
일정과 목적지도 문제가 됐다.
출발 전 친구들에게 어딜 가고 싶냐고 의견을 물었을 땐 분명 "우린 잘 모르니까 민지가 짜 주는 일정대로 갈게."라고 했지만, 현지에 도착했을 땐 여긴 이래서 싫고 저긴 저래서 별로라는 투정이 이어졌다.
여행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려웠고,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그러던 중에 일이 터졌다.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친구가 불만을 터뜨렸다.
"도쿄는 진짜 멋있다던데. 나는 옛날부터 일본이 훨씬 좋더라. 애초에 여행으로 이런 데를 올 게 아니라 일본을 갔어야 되는데."
평소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던 친구였기에 일본에 대한 환상이 컸을 것이고, 상하이와 도쿄는 매력요소가 다른 도시기에 이 여행이 친구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듣기 유쾌한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가이드 노릇의 대가가 이런 거라니! 그리고 왜 가본 적도 없는 일본을 대단한 곳인 양 떠받들면서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은 깎아내리는 거지?'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나도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면 니는 지금이라도 도쿄 가든가! 왜 여기 온다고 했는데?"
일본이 좋든 중국이 좋든 일단 이번 여행에 집중했으면 했다. 다음 여행으로 도쿄를 가도 늦지 않은 거니까. 왜 굳이 수학 시간에 국어 생각을 하고, 국어 시간에 수학 생각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이드 노릇 하기와 일본 타령 듣기에 지친 나는 이쯤에서 갈라져 각자 따로 다니자고 선언했다.
한 명은 화를 내며 펄쩍 뛰었고, 한 명은 중간에서 난처해했다.
친구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만 믿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왔는데 마찰 좀 있다고 따로 다니자 한 것이 괘씸했을 수도 있다. 버려진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감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때는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결국, 젊은 날의 여행기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떠났지만 다른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로 다시 만나 화해하고 아직 우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쓰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분이 풀리지 않는 시간은 오래 지속됐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별 일도 아닌데 싸웠네.'라는 자기반성을 하게 되었을 땐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난 후였다. 이제 와서 다시 찾기엔 너무나도 먼 사이가 됐다.
15년이 지났다.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나는 어느새 아내이자 엄마가 되었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상하이 주말여행 가는 짐을 싸다 그때를 떠올렸다. 예전보다 손톱만큼이라도 더 성숙해진 지금 시점이었다면 그 사단이 안 났을까를 생각해봤다.
내가 내린 답은 '그렇다'였다.
만약 지금 그때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아마도 친구들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해외에 안 가봐서 여행 어떻게 하는지 나도 잘 모른다. 지금 같이 가면 너희가 고생할 것 같은데. 일단 한 번 다녀와 보고, 다음에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식으로 다른 안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친구들이 나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확고하다면, 굳이 상하이를 고집하지 않고 셋 모두가 만족할만한 여행지를 새로 골랐을 것이다. 상하이야 다음에 가도 되는 거니까.
모두가 원하는 여행지를 고른 후엔 가이드북을 혼자 보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함께 봐야 했다.
각자가 꼭 가고 싶은 곳을 조사해 일정을 골고루 분배하고, 그에 따른 교통편이나 인근 식당 정보도 나눠서 알아보자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랬더라면 누구도 혼자서 어깨가 무겁지 않고, 누구도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는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이런 걸 생각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앞으로 다른 사람과 여행을 갈 땐 최소한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여행가방 속에 옷가지를 챙겨 넣으며 과거의 흑역사도 차곡차곡 접어 정리했다. 그런 상하이에 혼자 가는 기분은 묘했다.
다시 찾은 상하이는 여전히 재밌는 도시였다.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짐을 잔뜩 실은 자동차가 용케 도로를 달리고, 러닝셔츠만 입고 외출한 동네 아저씨는 길거리에서도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내가 중국어 못 하는 외국인인 것을 알면서도 손짓 발짓을 사용해주는 법이 없었다. 더 크게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귀가 떨어지도록 목소리만 높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상하이를 설명할 수 없다. 상하이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는 세계 어떤 도시보다 감각적으로 꾸며진 장소가 많다. 과거에는 요식업계나 문화예술계가 아시아를 공략할 때 도쿄로 상륙했다지만, 이제는 그 무게중심 일부가 상하이로 옮겨갔다는 것도 느껴졌다.
뉴욕에서 관람했던 <슬립 노 모어>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상하이에서 열리고 있었다. 스타벅스의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다는 피츠 커피도 도쿄엔 없지만 상하이엔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한 즐길거리를 제공해주는 도시로 변화해 가고 있었다.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길과 현대적인 빌딩이 절묘하게 어울려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내는 곳이 상하이다.
공존하기에 어려울 법한 대조적인 것들이 한 데 섞였기에 매력 있는 도시. 세계를 돌고 돌다 다시 와도 상하이는 여전히 신선했다.
상하이에는 여행자의 발길을 이끄는 장소가 많다.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이 숲을 이룬 푸둥, 150년 전의 건축물이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와이탄, 중국 남방식 정원인 예원, 차분하면서도 트렌디한 신천지, 걷기만 해도 재미있는 난징둥루, 도심과는 대조적인 분위기를 뽐내는 인근 수향 마을까지. 곳곳의 볼거리가 발걸음을 바쁘게 만든다.
다시 찾은 상하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푸둥이었다.
고층빌딩에 대한 감동이나 선망이 없는 나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이유가 있었다. 잊고 있던 과거의 감정이 한순간에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푸둥 전망대에 올랐을 때 나는 분명 울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던 미성년자 신분을 갓 벗어난 해.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내 힘만으로 낯선 도시를 탐험한 경험은 소중했다.
높은 곳에서 상하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본 찰나, 열흘 동안 스쳐갔던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거대한 성취감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구나. 이제부터 나를 이끌고, 보호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날이었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이루고 끊임없이 성취하라고 말하는 사회. 어른이 된 나는 웬만한 성취에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법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아주 짧은 안도를 느낄 뿐, 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달린다. 성취를 해도 성취감을 만끽할 여유가 없어진지 오래다.
그런 나에게 상하이는 아주 오래전에 느낀 '스스로에 대한 감동'을 살며시 꺼내 주었다. 긴 시간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라 그것이 내 것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낯설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제는 가지치기를 해야 할 나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지기 위한 '나에 대한 인정'이라는 가지는 그대로 남겨 더 크게 키우고, 나와 친구들을 아프게 했던 '관계의 서투름'이라는 가지는 잘라내야 한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해야 할지를 새삼 분별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좋은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의 다른 쪽은 변화로 채워가는 상하이를 보며 생각했다. 도시가 변하는 것처럼 사람도 달라져야 한다고.
시시각각 변하는 상하이 지도처럼 나도 이제는 변화해야겠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