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S>(2004)
어린 히어로들이 성장하는 방식은 모두 비슷하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깨달은 이후,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곧 특정한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예를 들면 세계평화 같은)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진정한 히어로가 된다.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가 그랬고,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다.
하지만 여기,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장을 이룬 히어로가 있다. 바로 <D.E.B.S>의 에이미이다. 그녀는 히어로로서의 미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원해온 삶을 살며 자신만의 성장을 이뤄나간다.
에이미는 SAT를 활용한 비밀 평가를 통해 살인, 음모, 사격, 격투 등에 뛰어난 잠재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를 선발하여 훈련시키는 비밀 조직 DEBS의 일원이다. 그녀는 DEBS 아카데미의 모든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엘리트 요원이지만, 첩보 업무에 전혀 관심이 없다. 또한 예민함과 큰 승부욕을 가진 맥스, 물건을 훔치는 기술이 뛰어난 자넷, 섹스 중독자 도미니크까지 확실한 스파이로서의 자질을 보이는 팀원들과 달리 특별한 자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에이미는 자신이 DEBS로 선발되고 팀의 리더, 나아가 DEBS 아카데미의 에이스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에이미의 팀에 새로운 미션이 주어진다. 바로 잔혹하기로 소문난, 레놀즈 범죄 조직의 리더인 루시 다이아몬드를 체포하는 것. 에이미는 마침 아카데미에 제출할 레포트의 주제를 루시 다이아몬드로 정해놓은 상황이었기에, 그녀를 만단다는 기대를 안고 미션에 임한다.
그리고 에이미는 미션을 수행하던 중 마주친 운명같이 루시와 사랑에 빠진다. 적이었던 그녀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이유는 '공감대'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히어로와, 악마로 불리는 빌런의 공감대라니.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조금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가진 'K-장녀'와 같은 성향을 이해하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에이미와 루시는 모두 타인으로부터 주어진 책임감으로 인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미가 DEBS 요원으로 선발된 이유는 '거짓말'을 하는 능력이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에이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상황을 합리화한다. 에이미는 미술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DEBS 아카데미의 친구들과 선생님의 큰 기대, 그리고 자신이 맡은 임무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인해 스파이 일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시키며 스파이 생활을 지속해왔다. 또 줄곧 모범생으로 자라온 에이미는 늘 적과의 로맨스를 즐기는 자넷과 달리, 일탈을 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왔다. 게다가 자신이 동성애 성향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남자 친구와의 사랑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루시도 마찬가지이다. 루시는 조직의 리더였던 아버지의 위상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범죄 생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린 여성이었기에 큰 범죄조직의 리더 자리를 늘 위협받아야 했고, 점점 더 잔혹한 범죄를 저질러야 했다.
에이미와 루시는 전혀 다른 듯 하지만 같은 상황에 처해있고,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했던 고민을 서로에게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공감대를 통해 형성된 사랑의 감정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해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결국 에이미는 스파이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루시는 에이미와 함께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함께 떠나기로 결심한다.
루시가 에이미에 대한 사랑의 크기가 자신이 가져온 책임감보다 크단 사실을 깨닫고, 범죄 생활 청산을 위해 자신이 훔쳐온 다이아몬드를 주인들에게 다시 되돌려주며 부르는 곡은 Erasure의 A Little Respect이다. '우리는 전쟁이 아닌 사랑을 할 수 있어'라는 가사는 루시가 에이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곡은 K-장녀(미국 틴에이저지만)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자신의 사랑과 꿈을 존중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Erasure의 앤디 벨은 이곡을 통해 대중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항상 이 곡을 노래하기 전, 케세라세라의 가사를 인용해 "제가 어린 소녀일 때 엄마에게 커서 동성애자가 되어도 괜찮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나에게 약간의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주면 괜찮다고 말씀하셨죠."라고 말하며 노래를 시작했다고 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고 싶다면, 그리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해보자. 미국과 세계평화가 아닌 빌런과의 데이트를 선택한 히어로, 에이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