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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핀 Aug 26. 2020

오늘도 한 잔의 위스키를 포기했을 당신에게

<소공녀>(2017)


 오늘도 아는 거라곤 그저 이름뿐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나를 한껏 부풀린 글을 쓰느라 밤을 새웠다. 그러다 무심코 열어본 서랍에서 종이 몇 장을 보았다. 극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준, 사용기한이 한참 지난 영화표였다. 한때는 영화표였지만 이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구깃한 종이들. 그것들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생각했다. ‘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제야 사회가 정해준 틀에 맞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내가 포기하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정말 사랑했고, 내 삶의 큰 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필자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인물이다. ‘미소’라는 이름의 모티브이자 이 영화의 영제는 ‘Microhabitat(미소생물서식지)’다. 미생물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적 요건을 모두 갖춘 곳을 의미한다. 영화 속 미소에게 세상은 그런 곳이다. 위스키, 담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애인 한솔이. 이 세 가지만 있다면, 세상은 미소가 살아가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서식지다. 그래서 매일이 마이너스인 생활에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한다. 그리고 지낼 곳을 얻기 위해 대학시절 밴드를 하며 뜨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찾아간다.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은 모두 금전적으로 미소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부자인 남편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눈치를 봐야 하는 재화, 큰 회사로 이직하기 위해 링거를 맞아가며 일하는 문영, 하우스 푸어가 되어가며 결혼을 했지만 결국 이혼을 하게 된 대용,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 사는 캥거루족 덕문,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 매일을 희생하는 국희. 그들은 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은 공허함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소의 선택을 의아해하고 한심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미소는 담담하게 반문한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미소의 이런 질문은 저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2030 청년들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욜로족과 힙스터로 표방되는 세대이지만, 사실 지금의 청년세대만큼 획일화된 삶을 사는 세대도 없을 것이다. 전국의 대학생 5명 중 한 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부 인기 직군의 직업을 얻기 위해 NCS, 인적성 시험을 공부한다. 인기 직업군 이외의 직업을 택하는 것에는 큰 모험이 따른다. 특정한 학위가 필요하거나 직종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 어려움들을 감수하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해도 사회적 시선이라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 이 직업들은 사회가 정한 ‘번듯한 직장’의 기준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루저’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렇게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노력을 하게 되어버린다.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미션이 남아있다. 바로 내 집 장만. 영화 속 하우스 푸어 대용의 대사가 이를 잘 대변한다.


 "이 집 얼만 줄 알아? 이자를 한 달에 100만 원씩 20년을 내야 해, 20년. 그런데 내 월급이 190만 원이야. 그렇게 20년을 내면 내 집이 돼. 그런데 그때는 이 집이 다 낡아버리겠지?”


 언뜻봐도 불합리한 현실이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이 황망한 목표를 거부하지 못하고 삶의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사회가 정한 이런 룰들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미소와 같은 삶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이러한 획일화된 틀을 의식하고 조금씩이라도 벗어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 고민해보고, 삶의 안식처가 되는 것들을 지켜나가면서 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살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소가 스스로의 세상을 미소생물서식지로 만들었듯 말이다.



  당신에게도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아마 바쁘고 지친 일상에 오랫동안 그것을 미뤄두고 참아왔을. 그것이 담배나 위스키처럼 타인에게는 사소하고 한심해 보이는 것이어도 상관없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세상이 억지로 안겨준 미션들보다, 내게 안식처가 되는 것들에 더 우선시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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