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장식이 본질이 될 수 있는가?
오늘의 이 글은 나름대로 비평가의 입장에서 써보려고 한다. 다소 과격하고, 논리의 비약이 있을 수 있다. 감안하고 보시면 좋을 듯 하다.
'장식은 죄악이다' 근대건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돌프 로스의 격언이다. 르꼬르뷔제는 보자르 스타일의 장식이 가득한 건축을 거부하며 근대건축의 기치를 들었고, 지금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축가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건축과에서 건축을 배우면서 생선가게라고 생선을 달고, 미용실이라고 빗과 가위를 다는 식의 설계는 죄악이라고 배웠고, 색깔마저 채도를 배제한 흰색 건축이 정답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이렇게 거부되었던 장식이 돌아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건축계에서 그러한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 소위 '영롱쌓기'라는 시공방식이다. 외장재료로 벽돌이 유행하면서, 많은 건축물에서 '디자인포인트'라는 이유로 영롱쌓기가 적용되고 있다. 이 '영롱쌓기'는 내외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야간에는 내부의 빛을 아름답게 걸러서 외부로 내보내는 효과가 있다. 처음에는 새롭고 신선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지만, 그 유행이 10여년을 넘어가면서 이제는 건축가들 모두가 식상해하는 아이템이 되고 말았다. 나 역시 몇 번의 벽돌 건물을 설계, 시공하면서 이 영롱쌓기를 안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건축주가 '예뻐보인다'는 이유로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로 적용을 했던 기억이 있다.
초창기에는 여러가지 의미부여를 하긴 했지만, 이제 '영롱쌓기'는 더도 덜도 아닌 '장식'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롱쌓기 뿐만 아니다. 창호의 위쪽을 둥글게 처리한 아치창이나 메스에서 곡선, 곡면을 넣는 방식 등도 최근 굉장히 자주 쓰이고 있는 건축요소들이다. 아예 완전히 동그란 창이 나타나기도 하고, 내부에 붙어있을 법한 몰딩이 건물 바깥에 붙기도 한다. 이것들 역시 엄밀히 말해 장식으로 보아야 할 요소들이다.
이러한 장식들이 자주 쓰이게 된 이유는, 예전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연관이 있다. '용적률 게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축주 그리고 프로젝트를 맡게 된 '젊은 건축가들'은 프로젝트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건축주는 용적률 그리고 면적에서 1%도 손해볼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프로젝트의 대전제가 되기 때문에 메스를 크게 어그러뜨리고 흔드는 계획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용적률 게임 그리고 법규로 인해 정해진 메스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스킨에서 몇 가지 시도를 해보는 것 뿐이다. 여기서 시도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롱쌓기'이다. 그 밖에 다양한 재료의 적용 또는 메스의 모서리, 창호 주변부 등에서 무언가 시도를 해보게 되는데, 이러한 말단적이고 지엽적인 시도들은 결국 '장식'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인테리어와 연관성이 깊어진 건축의 입장과도 관련이 있다. 인테리어는 본질적으로 골조가 정해진 상태에서 최종 마감재, 스킨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지 또는 각기 다른 마감재가 만나는 곳에 디테일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정도를 결정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할 수 있는 시도들이 '장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각종 매체의 범람으로 인해 대중이 시각적으로 매우 예민해진 상황에서, 이러한 인테리어적인 시도들이 말초적인 자극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 영향이 건축에까지 미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또한 21세기에 들어 대규모 자본에 잠식, 종속되어버린 건축의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대규모 부동산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건축설계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만들고 건축물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마케팅 수단처럼 활용되고 있다. 프리츠커를 받은 '거장' 건축가들마저 브랜드처럼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놀이동산의 거대 구조물과 같이, 도심 속의 랜드마크들은 스펙타클을 위한 스펙타클을 안들어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장식을 건축의 본질로 볼 수 있는가? 최소한 우리가 배워왔던 '건축'에서 장식은 본질이 아니었다. 평면적, 단면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새롭고 혁신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질서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촉발하는 매개체를 만드는 것이 전 세대 건축가들의 꿈이었다. 그런 시도가 없이 단지 대중에게 소비될 '예쁜 건물' '멋진 건물'을 만들겠다는 것은 근대건축의 사명을 저버린 것이며, 자본 혹은 인기에 종속된 몸종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건축으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보여주겠다는 시도,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의 생활을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 혹은 시도는 아직도 유효한가? 이루어질 수 없는 낭만주의 시대의 유토피아적 낙관론은 아니었나? 21세기에 자본에 종속된, 어느덧 부동산 마케팅의 수단이 되어버린 건축이 그 정도의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실 나 역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은 변했다. 선배들이 건축을 하던 시대와 우리 시대는 분명히 다르다. 지독한 불경기에 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적고 설계를 하겠다는 건축가는 시장에 넘쳐난다. 어떠한 혁신적인 시도를 하기에 그것을 밀어줄 건축주도 없고, 공공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버겁다. 대중과 자본가가 원하는 건축은 심오하거나 새롭거나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 말초신경을 자극할 '예쁜 건물'일 뿐이고, 그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건물을 만들어 내기에도 힘에 부친다. 이제 우리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시도라곤 '영롱쌓기' 밖에 없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상황를 이겨내고 극복하고 마침내 무언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고, 자주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식을 뛰어넘는 무엇을 만들어내야 한다. 많은 건축가들이 장식을 뛰어넘는 시도를 하고 있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 냈다. 나 역시 장식을 넘어선, 단순히 '예쁜' 건축을 넘어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개인적으로, 공간과 건축으로 사회를 바꾸겠다거나 사람의 인생을 바꾸겠다는 식의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다. 다만 의미없는 장식이 최대한 배제되고 절제된, 단단하게 구축된 느낌의 건축을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한번 더 정리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공간 또는 기성건축의 문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식의 건축은 앞으로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대안적 건축을 oma류의 '다이어그램' 건축으로 분류하고 있다. 2010 ~ 2020년대를 넘어가면서 건축설계를 할 때 다이어그램을 동원하는 건축가들이 점점 줄고 있다. '이런 옛날 방식은 식상하니까 이렇게 비틀어서 새로운 건물을 만들거야'라는 식의 시도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는 듯 하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치열하게 가다듬는 식의 설계를 하는 건축가들이 좀 더 오래 주목받고 있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분석하기로 앞서 말했던 '다이어그램' 류의 건축가는 oma, mvrdv, 도요이토 등이고 후자는 알바로 시자, 마리오 보타, 데이비드 치퍼필드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후자의 건축가들은 현란한 이론이나 다이어그램을 동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물을 돋보이게 할 '장식'을 동원하지도 않는다. 철저히 절제된 메스의 조합으로, 절제된 디테일로 풀어서 건물을 완성시킨다. 그런 과정을 통해 완성된 드라마틱한 공간은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것이 가능하기에 그들을 거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식'은 (근대)건축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이어그램 류의 건축을 만들든, 정제되고 숙련된 방식의 건축을 만들던지간에 그것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장식을 많이 썼던 안토니 가우디 조차도 자신의 건축의 본질이 장식이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no'를 외치리라.
결국 '젊은 건축가'들은 '영롱쌓기'를 뛰어넘어 본질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건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세대 다가구의 빌라가 되었든, 최대한의 전용면적을 요구받는 근생건물의 경우든 상관없이 말이다. 상황은 물론 어렵다. 하지만 그것에 성공해야 '젊은 건축가'들이 진정으로 다음 세대의 건축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되도록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