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alintheSea Mar 22. 2024

퇴사 여행 4. 똑같은 시간마다 반복되던 허기를 끊고

프랑스여행기 4. 엑상 프로방스, 뜨거운 여름에 다시 볼 수 있길.

매일 거의 2만보씩 걷던 게 결국 무리가 좀 왔던 것 같다. 발이 너무 아파서 절뚝거리며 걷다 숙소에 조금 일찍 돌아와 잠이 들었다. 거의 12시간을 자다 깨다 하면서 저녁을 건너뛰었다. 그러다 퇴사 전 반복되던 폭식과 무기력함이 아침 산책을 하던 중 갑자기 떠올랐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퇴사 전 1년 정도는 퇴근할 때쯤이면 엄청난 허기가 나를 지배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기필코 거의 먹지 않겠다고 매일 생각했지만 집에 가까워 올 때마다 탄수화물이 너무 그리워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루는 떡볶이, 하루는 피자, 하루는 김밥... 금방 때울 수 있는 음식들을 찾고, 허겁지겁 그것들을 먹고 나서는 후회와 함께 무기력함이 몰려와 집에 들어오면 옷가지를 던져두고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일정을 꽤나 많이 반복했다. 그러다 몸무게는 거의 1톤에 육박해 가고, 우울감은 더욱 심해졌었다.


매일매일 다이어트를 해야 하지 하는 마음과 무너지는 마음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나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을 치는 기분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지 뭐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하루하루 살아서 빚을 조금 더 갚고...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니까 사는 거지. 나는 나를 책임져야 하니까. 그렇게 계속 지내 왔다.


여행의 시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건 없는 것 같다. 아침이면 잠에서 깨고, 때가 되면 먹는다. 특히 유럽은 괜찮은 밥집들은 칼같이 식사 시간에만 영업하는 곳이 많아, 꼭 그 레스토랑들을 가지 않아도 어쩌다 보니 그 시간을 지키게 만드는 편이다. 어제는 저녁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때와 같은 허기는 오지 않아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는 근처 공원에 산책을 다녀왔다. 물이 풍부하다는 마을답게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작은 새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노래를 불렀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미나리 씨를 뿌리던 장면도 생각나고, 영화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빠지던 장면도 생각이 났다. 고요히 물결치는 미루나무들 사이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도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세잔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고장이니까. 풍요로운 라벤더 밭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기회가 있다면 다시 올 수 있겠지.


그런 허기가 다시 오진 않았으면 좋겠다. 무기력함이 퇴사의 원인은 아니긴 하지만, 천천히 망가지는 루틴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이번 여행으로 모든 것을 다 지우고 거듭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최소한 빚을 갚아 나가기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길, 간절히 빌었다. 물론 그 빚은 여행이 끝나도 그대로 남아 있고, 어떻게든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겠지만... 다른 길들을 찾기를.  한 길만이 정답이라고 믿고 의지한 순간에서 벗어났길. 길에서 나는 도망치고, 다시 마주 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여행 3. 아비뇽에서 나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