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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정 Nov 04. 2020

떠나간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는 마음

그림일지 (6)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수요일의 그림들>을 위해 그렸던 몇 장. 이게 벌써 1년 전이다. 한국에 갓 돌아와 일산 킨텍스에서 하는 디자인 페스티벌이라는 페어에 참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예상한 관객은 서일페 정도의 규모였는데, 실상은 관람객보다 참여자가 더 많았던 행사였다. 뭐, 덕분에 옆에 앉은 다른 작가님들을 사귀기엔 최고의 기회였다. 이 날은 <수요일의 그림들> 5주 차였고, 딱히 주어진 테마 없이 친구와 내가 그리고 싶은 아무거나 그리는 것이 나름의 주제였다. 오랜만에 로케이션 드로잉이나 해야지~ 하고 항상 챙기는 색연필과 색지 몇 장을 바리바리 싸갔다.

나보다 한 달 정도 늦게 한국에 돌아온 친구를 만난 날. 안보는 사이에 머리도 멋있게 염색을 했다.

이 그림 역시 반대편 부스에 앉아있던 사람을 그린 것 (으로 추정)

사람의 얼굴을 그릴 자신이 없을 때 자주 그리는 발.

관람객도 없어서 내가 고개만 들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반대편 부스에 앉아 있던 그. 이 날도 누구를 그릴까 두리번거리다 자연스레 앞에 앉은 그를 그리게 됐다. 특정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그리다 보면 굉장히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게 괜찮은 것인지 아닌지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직접 다가가 “저기... 제가 당신을 그려도 될까요?” 하고 물어볼 만큼 내 낯짝이 두껍지 못하다. 그래서 이 날도 도둑질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그렸다. 재미있는 건 보통 열에 아홉은 본인이 그려지고 있는 것을 알아 챈다. 그들이 모를 거라고 순진하게 믿는 건 나뿐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었던 내 그림 속 사람들의 관용에 감사한다.) 그래서인지, 그와 어느 순간부터 눈이 계속 마주치기 시작했다. 들켰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부스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림을 다른 종이 더미 밑으로 스윽 밀어 넣었다. 다행히도 그는 정말 순수히 내 부스를 구경하러 온 것이었고,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다 결국에 나는 내가 그를 그리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죄를 씻듯 그에게 그림을 보여주었고 다행히 그는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다. 이 날 이후로 우리는 자연스레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페어가 끝날 때쯤에 그는 현지씨가 되어 있었다.

페어가 굉장히 바빴다면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현지씨나 다른 작가님들을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를 놓치면 예상치 못한 다른 하나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다른 하나가 훨씬 좋은 것일 때가 많다. 사람도 그렇고 기회도 그렇다. 내 손에서 떠나간 것들을 아쉬워하는 마음보다, 덕분에 얻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더 크게 가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수요일의 그림들>
http://instagram.com/wednesdaydrawings
웹사이트
http://www.pinecone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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