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아이를 두고 해외파견 간 엄마 이야기
엄마는 여덟 명의 아이를 키웠다.
나와 동생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는 이모와 형편이 안 좋은 작은집을 대신해 네 명의 사촌동생들을 데려와 보살폈다. 동생이 결혼한 후에는 두 명의 손자를 도맡아 키웠다. 평생 육아를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안일과 육아가 인간 활동 중 최고 난이도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엄마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본인이 한 일들에 대해 "그게 뭐가 힘드냐?"라고 응수하는 마인드였다. 남들은 짐으로 여기는 일들이 엄마에게는 가벼운 일상일 뿐인 것 같았다. 나는 감히 엄마의 삶을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 남매와 사촌동생들을 키우는 동안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르고 방송대 4년을 성실히 다닌 후 평생 꿈이던 대학졸업장을 손에 넣었다. 손자들을 키우면서도 각종 모임의 장과 동네 통장직까지 섭렵하며 누구 못지않은 사회생활을 했다. 엄마는 해야할 일을 기꺼이 한 후에는 충실히 본인의 삶을 살았다. 스스로도 자유로웠고 우리들도 안정감과 자유로움을 느끼며 자랐다.
엄마의 역할이 꼭 옆에서 모든 걸 챙겨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내가 고3일때조차 본인의 공부에 열중했던 엄마의 모습은 서운함이 아니라 엄마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나중에 아이에게 ‘너때문에’ 내가 하려던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핑계대지 않기로했다. 하물며, 남편이 키우겠다고 나서는 판에 말이다.
파견을 결정한 후, 어느 날 남편과 내가 아이를 위해 남편의 업무시간을 어떻게 조정하는 게 좋을지, 하루 몇 시간 정도는 아이 돌봄 서비스 같은 것을 이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엄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애는 내가 봐줄 테니 돈이나들 벌어!"
이제 엄마는 아홉번째 아이, 내 딸을 봐 줄 차례였다. 그렇지 않아도 가까이 살면서 육아의 상당부분을 의지하던터였다. 그렇게 남편이 일하는 시간 동안 엄마가 아이를 봐주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출국날짜가 성큼성큼 다가오던 어느 날, 엄마는 무릎수술을 선언했다. 어느덧 엄마는 칠십 노인이 되어 있었고 점점 걷기가 힘들다고 하시더니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순간이 온 것이었다. '뭐가 힘드냐'라는 마인드로도 극복할 수 없는 신체의 한계가 온 것이랄까. 아닌 게 아니라 조카들을 키우면서 허리와 무릎의 기능이 눈에 띄게 나빠졌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툭하면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며 누워 있었다. 무릎 수술은 언젠가 해야 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이라니.
무릎 수술을 하면 한 달 이상 병원에 입원해서 재활과정을 거쳐야 하고, 퇴원 후에도 최소 3개월~6개월은 조심해야 일상생활을 겨우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니 엄마를 믿고 한시름 놓고 있던 나에겐 비상사태였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해외파견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인가 싶었다. 그때는 남편이 일을 정리할 일 년 여의 시간만 버티면 지금 생활을 유지하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방법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마지막 희망은 시댁이었다. 하지만 부탁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친정 엄마는 집 근처에 살면서 오가기로 했던 것이지만, 어머님은 사정이 달랐다. 다른 도시에 살고 계신 어머님은 평생 그 지역을 떠나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게다가 아직 일을 다니고 있었고, 아이를 봐주려면 살고 있는 집도 정리해야 했다. 우리 때문에 신변의 변화를 훨씬 크게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은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 일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 온 분이었다. 어머님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어머님의 삶에는 좀 더 고달픔이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자식에게 심적으로 의지하는 마음도 큰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어머님에게 그동안 썩 잘해드린 것도 없으면서, '저 해외파견 가게 아이 좀 봐주세요'하기엔 아무래도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적어도 남편입장에서는 장모님과 아이를 키우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어머님은 마침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일을 정리하기로 하고, 집을 세주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기로 하셨다. 나의 해외파견으로 어머님은 생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살게 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차라리 내가 아이를 데려가면 어떨까 수십 번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조금 생활이 안정되면 데려와서 혼자 키워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확신 없는 기대를 하며 조금만 버텨보자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날까지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곳,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들에 자주 놀러 가고, 같이 사진도 찍고, 함께한 좋은 기억들을 최대한 많이 남기려 노력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새 프놈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그때는 내가 떠난 후 아이가 겪게 될 정서적인 변화를 걱정하느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엄마인 내가 겪게 될 정서적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