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임상간호사로서 임상의 끝을 대하는 자세
간호사는 반드시 탈임상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다. 시한부 임상간호사이다. 여기서 ‘시한부’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한부의 의미는 끝이 정해져 있고 그 끝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임상에서 만난 환자들을 떠올려보자. 환자들이 시한부라는 것을 선고 받는 순간이 언제인가. 환자에게 더 이상 의료적으로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인 말기 상태가 되고 나서야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임상간호사로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내가 시한부임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온몸으로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임상간호사들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 간호사들이 하루에도 열 두번씩 ‘아 이건 오래 못 할 짓이다’ 라고 막연히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퇴사의 순간이 기억이 난다. 나의 퇴사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상사의 책상에 사표를 당차게 내리꽂는 장면도 없었고 뒤도 안 돌아볼 정도의 정 떨어짐도 없었다. 특별할 것 없는 퇴사가 두고 두고 기억이 나는 이유는 나의 퇴사의 순간, 우연히 다른 간호사의 퇴사 장면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퇴직원을 제출 후 파트장님께 인사를 드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 나는 파트장님 말씀에 적지 않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띵 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꽤 묵직한 무게감과 답답함이 생겼다. 이전에 퇴사한 선배간호사가 퇴사 면담을 하며 오랫동안 엉엉 울고 나갔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본인은 계속 일을 하고 싶었지만 육아 때문에 일을 계속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나의 가슴 속 깊숙히 남았다. 뼛 속 깊히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집에서 수많은 눈물의 나날을 미리 보내지 않았더라면 필히 그 선배간호사처럼 파트장님 앞에서 펑펑 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이 얼굴도 모르는 선배간호사의 눈물,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남 모르게 흘리고 있을 간호사들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기 전에 이를 예방해야 하는 일종의 사명이 내 안에 생겨났다.
퇴사를 하는 간호사의 상황과 배경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세상은 참 극과 극이기에 퇴사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퇴사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 극과 극 상황에서도 공통점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탈임상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일 당장이든 혹은 30년 후가 되었든 탈임상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임상의 끝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더 넓고 다양한 탈임상의 시대가 열린다. 이를 기억한다면 그 끝이 그리 쓰지만은 않을 것이다.
임상의 끝을 마주하며 나는 상실의 5단계 심리적 변화를 그대로 겪었다. 친정엄마의 육아포기 선언 후 처음에 나는 엄마의 육아포기를 부정했다. 그것은 곧 나의 임상의 끝을 의미했기에 나에게는 사형선고였고 반드시 부정해야만 했다.
“엄마, 진짜 이제 안 봐준다고? 아니지?”
이게 끝이 아니라고 어떻게든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봐주는 도우미를 구해야 하나, 나는 교대근무를 하는데 어떻게 스케쥴을 매번 맞춰야 하지.
상황이 여의치 않자 나는 분노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지, 왜 내가 필요한 시간에 아이를 맡길 수가 없는건지, 왜 나는 이 산을 넘을 수 없는건지 나의 모든 상황에 화가 났다.
그 후 나는 타협한다. ‘그래 이 정도면 많이 했다’. 7년의 시간. 너무 힘들고 버티기 어려워 출근길에 그냥 차에 치이고 싶었던 때도 있었던 내가 끝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걸로 만족하자. 딸로 입사해 두 아이의 엄마로 퇴사한다. 두 번의 육아휴직, 참 오래도 버텼다. 그래 장하다, 이 정도면 꽤 오래 한거야 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러다 우울감이 엄습한다. 그 험난했던 신규 시절도 견뎌냈는데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다시 일할 날이 오기나 할까, 나에게 사회생활이란 이제 없는건가. 속상한 감정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하윤아, 네가 우니까 엄마도 우는거야’ 나는 며칠 밤을 우는 둘째와 같이 울었다.
이렇게 나의 임상의 삶이 멈춰지자 그제서야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임상현장에서 다사다난 했던 울고 웃은 순간들이 순식간에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법이 없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끝을 수용하며 온전히 받아들였다.
물론 탈임상의 문을 열기 전까지는 이렇게 끝인줄로만 알았다.
인간이기에 상실에 대해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한 후 우울감을 충분히 맛본 후에야 수용하는 과정을 겪는다. 배우자의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스트레스 지수 100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Holmes와 Rahe가 고안한 스트레스 지수이다.
하지만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예측 가능했냐 혹은 그렇지 않았냐에 따라 느끼는 스트레스 정도의 차이도 꽤 크다. 돌발성이 고통의 크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루 아침에 황망하게 사고사로 죽음을 맞이한 것과 오랜 기간 지병으로 앓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 것에 사람들이 느끼는 충격이 다른 이유이다.
간호사로서 탈임상의 필연성을 반드시 인지하고 그 시기를 미리 예측하고 앞서 주도해야 한다. 그리하면 탈임상은 충격과 스트레스가 아니라 변화와 혁신의 퀀텀점프가 될 것이다.
시한부임을 선고를 받으며 임상의 끝을 맞이하면 하수, 탈임상을 인지했으나 준비하지 못했으면 중수이다. 고수는 탈임상에 무엇을 할지 정해놓고 그에 맞는 임상을 쌓는다.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이다.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탈임상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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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임상전문간호사 BCRN 리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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