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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Dec 18. 2023

그곳, 다른 생각




6년 전에 페루에 함께 갔던 입사 동기가 일본 여행을 제안했다. 5월에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이후 여행에 시들해있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가는 것인데 여정도 짧고, 가까운 일본이라 별 부담이 없어 흔쾌히 가기로 했다. 배에서 이틀 밤을 자고, 일본에서 이틀을 자는 것이라 여행 같지 않은 귀여운 놀이 같았다. 

닭장 같은 비좁은 좌석에 앉아 때가 되면 내어주는 기내식을 먹으며 사육(?) 당하는 것 같은 비행기에 비해 배는 안에서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 편하기도 했다. 갈 때는 일부러 다인실을 예매했는데 마침 승객이 다 차지 않아 생각 외로 지내기에 괜찮았다.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느라 잠을 설치는 동안 어느덧 다음 날 아침에 배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밖에는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지코항에 있는 숙소에 가방을 맡겨 놓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나왔다. 전차로 몇 정거장 되지 않아 이동하는데는 그다 불편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그날의 시모노세키항은 말 없는 조용한 소녀 같았다. 

가락토 시장은 평일이라 문을 열지 않아서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6년 전, 첫 혼행으로 키타큐슈로 왔었는데, 고쿠라에서 가락토 시장을 왔던 기억이 났다. 무더운 7월이라 그런지 그때 먹었던 초밥이 그다지 다시 먹고 싶은 맛은 아니어서 문을 닫은 시장이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시 찾은 가락토 시장은 뭔가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것이 있었다. 살면서 예전에 갔던 곳을 다시 찾을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해외에서 그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혼자 와서 시장에서 산 초밥 몇 점을 들고 시장 밖에서 점심으로 먹었던 기억이 났다. 벌써 6년이 더 된 일이다. 

키타큐슈의 첫 번째 혼행을 통해 나의 여행이나 생각, 그리고 삶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으니 어떻게 보면 이곳이 내겐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같이 간 친구가 워낙 부지런하기도 하고, 짧은 일정이라 아무 생각 없이 갔던 터라 모든 것을 친구가 하자는 대로 했다. 아침 8시에 배를 내린 후, 비바람이 몰아치는 중에 친구가 가자는 대로 따라다녔다. 시모노세키는 딱히 가 볼만한 데가 없었지만 친구는 열심히 나를 데리고 다녔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을 엄청 좋아하는 나는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 밖 풍경을 즐기고 싶었지만, 친구의 열정적인 안내가 고맙고 미안해서 차마 그러자고 하지 못했다. 







패키지여행에 익숙한 그녀는 나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갖고 있는 충실한 여행 가이드 같았다. 중간중간 시내버스 안에서 잠깐 졸기도 하며 피곤을 달랬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저녁에 나는 번 아웃이 되었다. 

여전히 체력적으로 거뜬한 그녀와 달리 나는 몸이 천 근 만 근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반나절은 고쿠라에서 각자 다니기로 제안했다. 6년 전에 가봤던 곳이라 딱히 가야 할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미술관을 가기로 했고, 그녀는 고쿠라 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잠시 얻은 자유시간(?) 동안 예전에 들렀던 미술관을 찾았다. 7월 무더위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찾았던 미술관은 잠시 땀을 식힐 수 있게도 하였지만, 첫 혼행의 두려움을 덜어내게 해주었고, 앞으로 혼행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곳이기도 했다. 

미술관은 관람객이 많지 않아 그때나 지금이나 조용했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림 전시가 아니라서 다소 아쉬웠지만, 미술관을 다시 들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오후에 다시 만난 친구와 점심을 먹고 고쿠라 역 지하에 있는 식품점에 들렀다. 역을 지날 때마다 맛있게 먹었던 망고 아이스크림 생각이 나서였다. 터키 아이스크림처럼 쫀쫀하고 적당히 달콤했던 망고 아이스크림을 통해 그 해 여름의 무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지하의 식품관을 찾았지만 아이스크림을 팔던 자리에는 마카롱 가게로 변해 있었다. 호텔을 나설 때부터 아이스크림 먹을 생각에 마음이 온통 들떴었는데, 하는 수 없이 진열대에 고운 색을 입고 놓여 있는 마카롱을 째려보며 가게를 나야 했다.







모지에 와서는 유명한 야키 카레를 먹어야 한다는 친구의 제안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 세 끼로 야키 카레를 먹었다. 두 군데는 우연히 들른 집, 한 군데는 검색해서 찾아낸 소문난 맛집이었는데 나는 그냥 들른 집 카레가 오히려 더 입에 맞았다. 언제나 검색이 다 맞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뒤를 돌아보면 그때마다 친구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 덕에 내가 찾아야 하는 수고로움을 많이 덜 수 있었다. 여행 친구가 있으면 좋은 점이기도 하다. 










사진을 워낙 좋아하는 친구라 틈만 나면 앞통수든, 뒤통수든 나를 찍어준다. 어떤 때는 2주 여행을 가도 내 사진 한 장 없이 돌아올 때가 있는데, 이 친구와 어딜 가면 만선의 고깃배처럼 생각지도 않은 사진들을 가득 담아 돌아오게 된다.

짧은 일정이라 생각했는데 워낙 작은 동네인데다가, 부산으로 가는 배가 저녁에 출항을 해서 하루 같은 일정이 남아서 마지막 날에는 간몬터널까지 걸어갔다 오기로 했다. 쉬엄쉬엄 느린 걸음으로 가니 편도에 3,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예전에 모지에 왔을 때는 습한 무더위에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항을 낀 주변만 겨우 둘러보았는데, 이번에는 겨울이지만 춥지 않아서 산책하기 딱 좋았다. 









간몬터널을 가는 길은 새파란 바다를 끼고 있었지만 무섭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날은 마치 넓은 시내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워보였다. 가다 보니 낚시꾼들이 제법 나와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바다가 워낙 맑아서 물속의 고기가 다 들여다 보였지만, 지나는 동안 고기를 낚아 올리는 낚시꾼은 보지 못했다. 

잡아 놓은 고기를 들여다보니 자잘한 것들인데 각양각색이었다. 작아서 놓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같은 장소에 두 번째로 오고 보니 그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시기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니 그럴 것이다. 어쨌든 다시 들른 모지에서 생각지도 못한 깊은 감회가 들었다. 

인생도 이렇게 복습할 수 있고,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훨씬 넓고, 깊게 그리고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는데, 갑자기 맞닥뜨린 그 처음의 생소함이 언제나 우리를 당황스럽고, 허둥대게 한다.








어쩌면 반복이 없어 귀한 것일 것이다. 되풀이할 수 없고, 이곳으로 되돌아올 수 없어서 미숙하더라도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일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짧은 여행에서 나는 가장 긴 시간을 회상하며 거슬러 돌아왔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일본의 어느 작은 항구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6년 전의 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의 설렘과 두려움, 그때 품었던 희망과 포부가 뒤섞여 오르며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내 인생의 어느 항구에 잠시 닻을 내리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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