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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Feb 21. 2024

흐드러지게 필 그때를 위해......





작년, 아트 페어에서 그림 구경을 하고 나오는 길에 거금을 들여 장미 붓 세 자루를 샀다. 끝이 날카롭게 되어 있어 장미꽃 같은 것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 당시에는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력이 안되면 장비로라도 밀어붙여야 할 것 같아서 사놓으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처음 사 본 붓이라 오자마자 써보았지만 사용법도 잘 몰랐고, 그 붓이 꼭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라서 오히려 불편하기만 했다. 괜히 돈만 날린 것 같아서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 후로 장미 붓은 몇 달 동안 다른 붓 사이에서 들러리처럼 붓 케이스에 꽂혀있었다.





© jess baileydesigns, 출처 Unsplash





수채화의 맛도 조금씩 알아가면서 이런저런 그림을 손에 잡히는 대로 그렸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그림도 일단 많이 그려보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백과 작약을 그리면서 문득 사놓고 처박아 두었던 장미 붓이 떠올랐다.

기존에 사용하던 둥근 붓은 끝이 장미 붓에 비해 뭉툭하다 보니 꽃잎을 그릴 때 아쉬움이 있었는데, 붓을 바꾸고 나니 표현이 훨씬 잘 되고 그리기가 수월했다. 더욱이 꽃 몇 송이를 그리고 나니 붓이 손에 착착 붙는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이번에는 붓을 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vladkimphotos, 출처 Unsplash




장미 붓이 없었으면 가뜩이나 모자라는 실력에 둔한 붓으로 섬세한 꽃잎을 그리며 얼마나 또 열을 받아서 붓을 분질러 버리고 싶어 했을까 싶다. 좋은 장비를 장착해서 그런지 새벽을 훌쩍 넘기도록 그림을 그렸다. 세밀한 꽃잎을 그리는데 손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쭉쭉 그려진다.

물속에서 번져가는 색색의 물감, 그것이 이루어내는 오묘한 색감의 조화 그리고 마술처럼 살아나는 형태를 보면서 밤을 꼴딱 새워 그림을 그려도 혈기 왕성한 검붉은 동백처럼 여전히 쌩쌩하다.





             © nessylove, 출처 Unsplash




생각지도 않은 장미 붓의 맛을 호사롭게 누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때가 있는 게 아닌가...... 극대화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그와 연관된 것들이 충분히 준비되고 잘 숙성되어야 비로소 그 무언가를 완성할 수 있는 시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끔 우리는 설익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가를 바라지만, 투명하고 정직한 수학 공식 같은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대충 하고 완성된 결과물을 얻으려고 한 것 같다. 제대로 다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최고를 누리려고 했던 것 같다.





© furrukh, 출처 Unsplash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장미 붓이 내 가슴에 굵고 선명한 터치를 남긴다. 오늘의 이 생각이 게으름에 밀려나지 않도록 또렷하게 기억하라고...... 삶이 거저 가져다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어깨가 빠지도록 밤새 숱한 그림을 그리고, 고민하면서도 끊지 않고 이어가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귀인 같은 붓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짜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많은 갈등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무던히 노력하다 보면 좋은 계절을 만나 만개하는 꽃처럼, 우리 인생도 흐드러지게 피는 때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그때를 위해 각자의 스케치북에 내 삶의 그림을 채워가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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