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뜻밖의 동행

by 파란 해밀


2020. 12. 22.


6~7년 전쯤일까? 친구와 터키를 다녀오고 나서 해마다 한 번 해외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30년 지기 그녀는 그다지 튀는 타입이 아니라서 여행도 무난하게 잘 맞는 친구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휴가 일정이나 경비를 나름대로 준비하면서 다음 여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더운 한더위가 꺾어질 즈음 크로아티아 여행을 제안했다.

그랬더니 패키지로 가기로 했던 사람이 갑자기 취소를 해서 한자리가 비었다며 지인이 같이 가자고 하는 바람에 다녀오느라 연이어 두 번 가기는 좀 부담스럽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번 꼭 함께 하기로 해놓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혼자 홀라당 다녀와서는 못 가겠다고 하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미 먹은 마음이라 여행카페에 동행을 구하는 글을 올렸다. 여행지, 나이, 성별, 여행 취향에 대해 적어놓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지만 대부분 일정이 다르거나, 한 달 살기를 원해서 나와는 상황이 맞지 않았다. 그냥 없던 일로 해야 하나 할 즈음 최상의 조건으로 연락이 왔다.



55e3d3404d55b108f5d08460962c357f103adae54e5077497d2a79d59f4ec5_1280.jpg 출처 네이버 포스트



본인은 크로아티아와 인접한 나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한 달 정도 남았는데, 가족들은 며칠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마지막 휴가를 크로아티아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카페에 올린 글을 읽어보니 본인과 여행 취향이 너무 비슷해서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고 한다. 일정이나 숙소는 본인이 다 준비할 테니 국제 운전면허증만 준비해서 오면 자동차로 일주하면서 중간에 운전만 조금씩 나누어하자고 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오면 공항에 차로 픽업하러 나오겠다고 한다. 국적선 어느 비행기가 가격이 가장 좋다며 이것저것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나에게 딱 맞는, 아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여행 파트너였다. 내가 가기로 했던 일정대로 날짜를 정하고 알려주는 대로 대한항공으로 일단 티켓 예매도 하고 결제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편에게도 좋은 여행 동무를 구하게 되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다.

"그래? 잘 됐네"

순조롭게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여행 스케줄을 짤 필요도 없고, 몸만 달랑 가면 되는 데다 픽업까지 나와주니 내 남은 생애 이보다 더 편한 여행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느 정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자 그동안 톡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비록 여행이라는 가장 큰 공통분모가 있고, 여행 취향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지만 나이 40이 넘으면 본인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너무 까탈스러운 사람이 아니길 바라며 프로필 사진을 열어보았다. 난데없이 중년의 남자가 있다.

'왜 남편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았지?'
'남편을 엄청 사랑하나 보네?'
'아이들이나 손자, 손녀 사진을 올려놓기는 해도 남편 사진 올려놓은 사람은 처음 보네'

연결된 sns에는 가족여행 사진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젊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이번 여행도 내가 원하는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출근해서 오전에 바쁜 일을 마무리해놓고 항공권 결제를 하려고 하다가 일반적이지 않은 프로필 사진이 문득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사이가 좋더라도 부부가 함께 찍은 것도 아니고, 배우자만 있는 사진을 올리는 건 드문 일이다. 결제 시한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톡을 보냈다. 그쪽에는 새벽 2시가량 되는 시각이지만, 갑자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남자분이신가요?"
깊은 잠에 빠져서 못 들으면 어쩌지 하며 보내 놓고도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답을 보내왔다.

"네. 그렇습니다."
"카페에 여자라는 성별을 밝혀서 저는 여자분인 줄 알았어요. 성함도 그렇고......"
"주재원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가족들은 한국으로 먼저 돌아갔다는 얘기도 했고요."
"우리 회사에서는 여자들이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기도 해서 그것으로 남자분이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그래서 함께 오실 분이 있으면 같이 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단둘이는 좀 힘들겠지요?"
"네. 안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photo-1488509082528-cefbba5ad692.jpg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그랬다. 그는 함께 올 사람이 있으면 같이 와도 된다고 했다. 렌터카로 이동할 예정이라 다른 여행에 비해 다소 수월할 듯하여 오랫동안 함께 그림을 그렸던 지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유럽여행을 하고 싶어 했으나 나만큼이나 저질 체력이라 여유롭게 다니면 가능할 듯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못하다고 해서 그냥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때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의심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누가 들어도 여자 이름으로 착각할 만큼 화려하고 예쁜 이름이었다. 흔히 접하는 평범한 남자 이름이었다면 애초에 연락이 왔을 때부터 응하지 않았을 텐데 일이 꼬이려고 하니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 맞아떨어졌다.

내가 여자이니 당연히 여자로부터 만 연락이 올 것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은 프로필 사진을 보고도 상대방의 남편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해외 주재원은 남자만 가능하다는 그의 고정관념은 굳이 성별을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는 복선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여자 이름 같은 그의 이름이 결정적으로 이 모든 상황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렇게 이 일은 웃픈 해프닝으로 끝이 나고 대학생이던 큰아들을 꼬드겨 둘이서 동유럽 3개국 여행을 다녀왔다.

막상 여행을 떠나보면 길 위에서 만나는 여행객들의 반 이상이 남자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행 열차 안에서 만나 가는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오스트리아 아저씨, 언젠가 시드니에 오면 멋진 해변으로 데려다주겠다며 명함을 건네주던 씨엠립에서 만난 호주 엔지니어와는 수영으로 대화가 풍성했고, 칠레 이스트섬에서 이틀 동안 함께 다녔던 대만에서 온 남자 사제지간과는 숙소에서 같이 밥을 해 먹으며 식구(?)가 되기도 했다. 조지아 므츠크헤타에서 함께 여행했던 세심한 프랑스 청년 안토니오, 플리트비체 물빛만큼 싱그러웠던 미국 청년, 슬로베니아 박물관에서 만나 열심히 역사를 설명해 주던 현지인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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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 여행이라는 공통분모로 우리는 쉽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여행만으로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경험에 내 일처럼 덩달아 신바람 나며 즐거워한다. 거기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늙은 이, 젊은 이가 없다. 너와 나, 그저 길을 떠난 다 같은 나그네라는 동질감으로 쉽게 친구가 되어 허물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6~7년이 지난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도 나처럼 마음이 맞는 여행 동무를 원했을 것이다. 내가 필요에 의해 그랬듯 그도 나와 같은 필요가 있었을 테고 취향이 서로 비슷하다 생각해서 연락했을 것이다. 성별을 떠나 그도 순수한 여행자였을 텐데 지레 철벽을 두르고 이실직고하지 않은 나쁜 놈(?) 취급을 했던 것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새삼 미안해진다.

작정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저 위의 이들처럼 어쩌다 길에서 만나 동행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좋은 여행 동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심과 조심의 경계가 무엇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참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생각의 빗장이 조금 여유로워졌다고나 할까? 요즘처럼 길게 이어지는 빼앗긴 여행철에 오래전에 빼앗긴(?) 동행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