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의 시작
자그레브에서 짧은 일정을 마치고 차를 타고 한적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저 멀리서부터 산꼭대기에 작은 모자를 올려놓은 것 같은 마을이 보인다. 모토분이다.
마을에 들어가기 전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올라가야 한다. 마을 규모에 비해 주차관리가 철저하다. 주차요원이 시키는 대로 가니 다행히 주차공간이 넉넉하다. 주차장부터 숙소까지는 걸어가야 하는데 가는 길은 돌로 된 울퉁불퉁한 오르막이라 캐리어를 끌거나 들고 가기가 만만치 않다.
캐리어 바퀴가 빠지거나 내 팔이 빠지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래도 막상 마을이 있는 꼭대기에 다다르면 그 보상은 경치로 넉넉히 받는다.
모토분은 동화 속에서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이 사는 마을 같다.
"넘어지면 코 닿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을까? 정말 위에서 넘어지면 아랫녁에 코가 닿을 것처럼 동네는 아주 작다. 다른 이름 난 도시에 비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예약한 숙소는 겉에서는 허름해 보였지만 실내는 정갈하면서도 분위기 있게 꾸며놓았다. 중년의 호스트는 미리 집 앞에 나와 조용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터라 적당한 식당을 물어보니 맞은편에 있는 [몬도]를 추천해준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그곳의 음식은 맞춤형 음식처럼 우리 입에 꼭 맞는 훌륭한 성찬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숙소에서 쉬겠다는 일행을 남겨두고 살그머니 골목길로 나가 보았다. 비가 오락가락한다.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집들의 작은 창으로 도란도란 이야기가 새어 나올 것 같다.
빤히 보이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을을 다 돌아본다. 작은 요새처럼 산 정상에 앉아 있는 마을은 주변과 잘 어우러진 방금 물에서 건져 올린 한 폭의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깨끗하다.
서서히 구름이 비껴 나는 모토분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바라보는 사람의 숨도 삼키게 한다. 사방으로 펼쳐진 푸른 녹음 한가운데 소담스러운 마을이 마치 잘 버무린 만두소처럼 한 움큼 들어앉아 있다. 우두커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호도독호도독 떨어지던 빗소리마저 소리 죽여 조용조용 내린다.
멀리서 온 손님을 알아보고 미안해서일까? 연신 흩뿌리던 빗방울이 슬그머니 잦아든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골목으로 다시 나섰다. 한 귀퉁이에 합판으로 이어 만든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다. 가뜩이나 작은 동네에 비마저 내리니 적은 손님이 그조차 더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안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크로아티아 아가씨와 눈에 맞았다. 아버지가 직접 만든 목공예품과 도자기를 팔고 있었다. 나도 할 일 없고, 저도 손님이 없으니 죽이 맞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30대 초반을 넘어선 아가씨는 자신의 슬픈 연애사와 크로아티아 여인의 힘든 삶에 대해 열변을 토해가며 이야기했다. 책임감 없고 카드게임하느라 주구장창 월급을 탕진하는 남자 친구 때문에 속을 끓이다 급기야 헤어지느라 안 피우던 담배까지 피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다시 열이 받는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진하게 피워댄다.
우리나라 6,70년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갈까? 크로아티아 여성들은 죽어라 일을 한다고 한다. 남자들은 한 마디로 한량이다. 일을 하면 그 돈은 유흥으로 써버리기 일쑤이고, 일을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러면 아이들과 살아야 하는 여자들이 생활 전선으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고 한다.
가까이에는 결혼한 언니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어서 결혼에 대한 환상은 옛날 옛적에 다 깨어지고,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 남녀의 역할에 대한 불합리한 사고가 바뀌기까지 크로아티아는 또 얼마나 많은 과정과 시간을 보내야 할지 하늘 한 귀퉁이에 걸려 있는 먹구름을 보는 것 같다.
비가 와서 가져나갔던 양산 겸 우산을 보고 그녀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크로아티아에는 없는 물건이라며 한 번 써봐도 되냐고 묻는다. 그러라고 했더니 양산을 펴서는 요리조리 포즈를 잘도 잡는다. 굵은 허벅지나 불룩 나온 두둑한 배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의 당당함이 다시 나오는 쨍한 햇살처럼 보기 좋다.
둘이는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두 시간쯤 그렇게 떠들어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신세 한탄을 했다가, 서로 사는 이야기를 했다가 같이 간 일행에 붙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가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작은 도자기 소품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선물로 건네주며 그녀의 이름 [NADA JOKIC]를 적어준다. 나도 그녀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리를 떴다.
소문난 관광지를 다리가 아프도록 다닌 것보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여전히 그녀는 그 가게에서 소품을 팔고 있는지......
아직도 그 날처럼 모토분의 하늘에 탄식 섞인 담배 연기를 진하게 뿜어대고 있는지......
그녀가 더 이상 한량 같은 남자 친구 때문에 속 끓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 날의 모토분을 눈으로 다시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