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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Feb 23. 2024

어떤 소원을 빌었어?

#1. 눈




눈은 따뜻하다.


 아주 오래된 일들을 나는 자꾸 반추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버릇이다. 게워내고 다시 삼키는 작업을 반복하며 점차 형체를 잃어가는 괴상한 버릇이다. 나는 마침표를 찍은 적이 없다. 잊겠노라 애써 노력한 적도 없다. 덕분에 눈이 내리면 필연적으로 어떤 날들이 책장을 넘긴다.


 귀에 들리는 음악은 김현철의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유리창에 김이 서린다. 괜히 입김을 한번 더 불고, 손가락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린다. 이내 흘러내린다. 차 뒷좌석에 앉는 건 언제나 즐겁다. 은색의 엑센트. 눕고 싶으면 마음껏 눕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목소리를 높인다. 몰래 크리스마스 소원을 빌어본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기보다는 사실 다른 걸 원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이제는 그럴 수 없고…’라는 말에는 마력이 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무력해지는 무서운 힘. 이렇게 추운 날 내 가슴에 너의 손을 넣고 녹여줬었지. 이제는 그럴 수 없지만 그땐 그랬어. 문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무리 눈이 펑펑 내려도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어. 아, 과거를 과거로 만드는 이상한 그늘.


 운전에는 눈이 독이다. 하루종일 차를 모는 사람을 위해 눈 따위 내리지 말라고 차가운 말을 퍼부었다. 아무리 기도해도 차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폭설은 어김없이 왔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눈발. 계속 바라보고 있자면 추락의 반작용으로 부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눈은 따뜻하다.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나에게 너무나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차갑지 않은 건. 뭉뚱그려진 기억이 여전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살을 에는 바람이 마냥 서럽지만은 않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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