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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심씨 Oct 02. 2024

지식의 저주에 빠진 당신의 보고서

A, B, C 안 중에 하나 골라주세요.

팀원이 생기면서 힘든 점 중에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팀원은 여럿인데 팀장은 하나인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철없던 신입 시절에야 나도 저 팀장처럼 저렇게 대충 결재만 하면서 돈벌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작 팀장이 되어보니 여러명의 팀원들이 한꺼번에 올리는 결재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많은 HR담당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장 효율적으로 목표를 공유하고 업무를 분배할 수 있는 '3명'을 넘지 않게 팀을 꾸리려고 늘 노력하고 있지만 나의 부족한 능력에서는 팀원이 3명인 상황도 버거운 경우들이 많다.


그런 버거운 상황 속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들고 오는 안건들과 보고서, 그것들을 읽어내려가며 상황을 파악하고 의사결정들을 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다가 한번씩 숨이 막힐 정도로 굴러오는 친구들이 있다.


바로 "방향성 없는 보고(또는 선택상황)"


듣자마자 정말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방향성이 없는 보고들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


"팀장님, 유료 채용 공고 기간이 종료되었는데 연장할까요?"

"팀장님, 오늘 회식 A,B,C식당이 있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그럴 때면 (팀원들에게 최대한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는 그때부터 나만의 보고자료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다.


해당 채용공고의 효과성이 어떠하였는지, 해당 공고에서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채용공고를 중단할 경우에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지를 그때부터 하나하나 찾아본다. A,B,C식당의 장점과 단점을 고려하여서 우리의 회식 조건에서 가장 최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의사결정을 위해 하나하나 상황을 분석하고 있노라면 '야, 이럴 거면 내가 그냥 다 하지.'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00님, 이렇게 보고를 할 때는 '현재 상황이 어떠하고, 그것으로 인한 효과성이 이러하니, 그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이러한 기대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내키지 않으시면 B안도 있습니다.'라고 보고를 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해주라도 하면...


"사소한 걸로 트집잡으며 보고를 위한 보고를 하는 팀장"으로 잡플래닛에 리뷰가 달린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싶기에 작은 일에 숙련도는 높일 생각이 없다는 요즘 신입직원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이렇게 브런치에만 글을 쓴다.




'지식의 저주'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타인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발행하는 인식적 차이이다. 선생님이 열심히 수업을 하는데, 학생이 기본적인 개념을 물을 때 '아니 이것도 몰라?'라고 하는 것들이 지식의 저주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많은 중소기업 직장인들의 보고서는 지식의 저주에 빠져있다. (적어도 큰 회사에서 일을 했을 때는 이러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서로의 배경지식에 대한 동기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와 보고들이 오고가면 잘못된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귀찮은 마음에 동기화의 과정을 거치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든 직장인들은 자신이 먹기 좋은 형태로 밥상을 차려서 넘겨주는 동료직원을 좋아한다. 또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일을 잘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다 차려주고 싶지는 않고, 타인은 다 차려주었으면 하니 참으로 이기적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 이기심들 속에서 내가 돋보이려면 반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힌트를 얻는다.


그러니 당신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사실 일을 할 때는 협업 대상자가 상대방이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여서 업무를 할 수 있게 내 노력을 더 들여보자. 상대가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열심히 준비한 직원으로 칭찬받을 있고, 사전에 몰랐더라면 원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이끌어낼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팀장님, 뭔지 잘 모르겠는 공문이 와서 전달드렸습니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혼자 일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가끔 보고서를 찢는 나를 상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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