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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한 Apr 09. 2023

감히 써 본 난중일기 중 조금( 브런치 탈락 글 )


임진년 1월 초 1일 (임술) 맑다 [ 양력 2월 13일 ]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이나 설을 세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마사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바치러 가지고 왔다.


편전이라…   애기살이다. 

애기살.

오래전 나는 함경도 북쪽 끝 두만강 삼각지 녹둔도에서 애기살을 장전하고 여진족과  맞서야 했다. 그때의 나는 종사품 젊은 만호였다.  두 해마다 남도의 거센 바다와 북쪽의 험한 변방을 옮겨 다니다 보니 벼슬은 낮지 않았다.  



마니응개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 녹둔도 둔전관으로 온 후 변경을 살필 때  강 너머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 둔전 : 고려·조선 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


Si Saiyuun !   ‘안녕하세요!’ 하며 녀석이 강을 건너오다 말고 멀리서 만주어로 말을 걸어왔었다.

Sinde ai baita bi ?  ‘무슨 일인가요?’ 라며 다소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말했고

Yaya baita akku.  Sirame Acaki !   ‘별 일 아닙니다. 또 봅시다!’ 라며 녀석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오랑캐 땅으로 사라졌었다.  [별 일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녀석이 이를 드러내고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육식동물의 이빨처럼 희고 길었다. 거슬리는 덩치와 얼굴과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추수를 곧 앞두고 노랗게 익어가는 둔전이 오히려 불길하게 보였던 것은 그놈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이 둔전의 곡식일까 아니면 우리 백성일까.  수렵을 하여 사는 종족이라 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또 봅시다]라는 말.   

저 야만인들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국경을 수비할 군사가 무조건 더 필요했다.

“이곳 녹둔도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랑캐들이 호시탐탐 쳐들어올 기회를 엿보고 있는 곳인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너무 적으니 군병을 더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북병사 이일(李鎰)은 번번이 내 장계를 무시했다. 아무리 공손하게 써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국경이 엄연한데 저 야만족들은 우리 군사의 수가 적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어,  두만강 얕은 쪽 물 건너기를 일삼고 있다. 



 

오랑캐 대군이  쳐들어 온 것은 그놈이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한 날로부터 보름 뒤 대낮.

군영이 있는 목책 방비를 서는 병사의 수가 특히 적은 날이었다. 

농사일을 거들게도 하고  경계를 서게도 할 겸, 백성들이 둔전에서 일을 할 때면 군사들을 딸려 보냈었다.  마니응개가 보고 간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수확 때 군사들이 농사에 대거 동원될 것이라는 것.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북쪽에서 이는 흙먼지로 눈을 돌렸다.

오랑캐 기병은 빨랐다.  멀리 흙먼지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었다.

우리 군사들은 재빨리 목책의 방패 뒤로 전열 했다.  귀에 익지 않은 소음이 들리면 이렇게 하자고 훈련했다. 그것이 사람 소리든 귀신 소리든 짐승 소리든.  여기가 국경인 까닭이다.


‘애기살을 쏘아라’


--- 중략 ---


우리 군사들의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중과부적이었다.  조선의  아둔한 무기인 당파(삼지창)를 들고 싸우며 죽어 갔다.  그 틈을 타 우람한 적군 하나가 담장을 뛰어넘어왔고  이몽서의 활이 그를 맞혔다.  마니응개였다.  ‘살려 주시오’  조선말로 애원하는 그의 목을 베었다. 참수된 그의 머리를 창 끝에 꽂아 높이 드니 적이 주춤하여 한동안 다가오지 못했다. 장전된 현자총통과 승자총통이 또 불을 뿜었고, 저만치 물러난 적들을 향해 애기살들이 다시 날았다.


이경록과 나는 말을 달렸다.  오랑캐 군사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포로들을 나눠 데려가고 있다 했다.  가장 큰 시전부락 쪽으로 달렸다. 부락이 크니  많은 노예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십 리를 달렸을 때  예닐곱 명의 적들이  한 무리의 조선 백성들을 끌고 가는 것이 보여 다짜고짜 달려들어 세명의 목을 베니 나머지는 도망갔다.  쉰 명의 백성들을 되찾아 왔다. 아낙들과 어린애들이 ‘장군님 장군님’ 하며 내 손을 잡고 좋아했다.  종사품의  무관인 내게 장군이라니 당치 않았다.

 

아군 열한 명 전사   백성 백 여섯 명 납치   열다섯 마리 말 소실.

오랑캐 대군을 맞아 벌인 전투의 결과였다.

패배라고 할 수는 없어도 백 여섯 명의 가족들에게는 죄를 지었다.

.

하지만 북병사 이일은 패전한 책임을 내게 물었고, 내 여러 번의 장계를 무시한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웠는지  더욱 험하고 사납게 굴었다. 죽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을 옥사일 줄 알았다.

‘우리는 여기서 그만 죽겠습니다’ 이경록이 헝클어진 머리를 입바람으로 불며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다만 위로 어머니께서 살아 계셔  먼저 죽는 불효가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임금의 성정을 아는 모든 이들은 귀를 의심하였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패장에겐 자초지종을 묻지 않고 참하는 것이 관례였다.


임금은 군의 명령체계와  나를 함께 지켜 주었다. 북병사 이일 그 작자의 위신도 있어 내게 장 백대와 백의종군하라는 벌이 내려졌다. 임금의 당부가 있었는지 곤장은 견딜만했다.


넉 달 후, 조정은  오랑캐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하게 했다.

조선 백성 백여 명의 구출 작전이기도 했다. 조선 정예군 이천 칠백 명이 야밤을 틈 타  두만강을 넘었다.

나는 우화열장(右火烈將)이라는 직책으로 군의 오른쪽 승자총통 부대를 지휘했다. 총통수 스무 명과 사수 서른 명을 이끌었다.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않아도 승전에는 하등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임금의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라’는 명에 따랐다. 


시전부락에 도착한 조선군은 마을을 도륙했다.

누가 오랑캐인지 누가 선량한 백성인지 알 수 없으리만치 참혹한 보복이 자행되었다. 종족 자체가 하나의 군 편성체인 여진족이지만 화기를 갖춘 조선정예대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대추장 우을기내가 내 손에 죽었다. 우을기내의 가솔 중 살아남은 어린 몸종 하나에게 조선 옷을 입히고 조선인들 사이에 숨겨 데려와 이름을 ‘여진’이라 지었다.  나는 사면되었다.




‘나으리,  김인보 나리 와 계십니다’

몸종 여진이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  김인보?  녹도만호의 아우가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오늘은 바로 전 임금인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 씨의 제삿날이라 내가 동원에 나와 있음을 모를 터인데.

‘뫼시어라’


임진년 1월 초 2일 (계해)  맑다. [ 양력 2월 14일 ]

나라의 제삿날임( 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기일 )에도 공무를 보았다.  김인보( 金仁甫  )와 함께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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