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바그너의 ‘디자인의 가치’를 읽고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에서 Dall-E 2를 기반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곧 런칭을 앞두고 있는 Microsoft Designer의 구현 영상을 보면, 전체적인 완성도와 대중의 취향을 고려한 심미성이 상당히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 프로세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이 흐름 속에서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디자이너는 디자인 인공지능이 주를 이루는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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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지금까지 디자인을 문제 해결 방안으로 보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목적은 곧 기업의 이익이다. 따라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수익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디자인은 사용되었고 인식되었다. 이때의 디자인은 형태 부여의 수단이며 단순히 미학적 기능을 전달하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미학의 기준은 개인이 아닌 대중이다. 세계화로 인해 특정 몇 개의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개개인의 취향이나 개성보다는 대중의 선호도가 곧 개인의 선호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시장에 초점을 맞춰 상업성을 높일 수 있는 디자인, 이런 단순한 수준의 비주얼 작업은 인공지능이 더 쉽고 빠르게 잘할 수 있다.
사람들이 디자인을 조형적인 작업으로만 인식하도록 일조한 것은 결국 디자이너들이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디자인 작업을 하며 그 어떤 철학적인 고민이나 사회 정치적 영향을 다루지 않았다. 우리조차도 클라이언트의 눈치를 보며 형태 부여 작업에 집중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Dall-E 2가 탑재된 인공지능들이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더 잘 알고 잘 반영해줄 것이다. 더구나 사회 분위기와 문화적 트렌드가 획일화된 세상에서는 기계의 승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 즉 철학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기계가 하지 못하는 것,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바로 철학이다. 디자이너들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비주얼 솔루션을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사고와 이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철학이 깃든 디자인을 고민해야 한다.
철학을 갖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단계는 타인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즉,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나가기 전에 인문학적 접근과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 저자는 디자인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구스타프 페히너의 ‘미학 입문’을 인용했다. “예술 작품이 추구해야 할 가치 중, 내용 자체가 그대로 표현되는 형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동안은 의뢰인이 내용과 메시지를 고민하고 디자이너가 표현을 고민하며 공동 책임자 역할을 했지만, 이 둘이 나눠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디자이너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즉,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할 건지 모두 고민해야 한다. 고민의 결과로 인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디자인을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는 시장에 있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을 통해 사회문화적, 소비 지배 구조를 규제할 수 있다. 즉, 대중들이 옳은 걸 원하도록, 옳은 선택지에 수요가 발생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디자이너의 가치 규범이자 윤리 기준이다. 의사들이 인간의 생명을 숭고히 여기며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건,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받은 교육 덕분이라고 한다. 의사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그들에게 책임 의식을 심어준 것처럼, 디자이너들도 사회에서 원하는 자격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올바른 가치 규범을 갖고 의식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 책에서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디자인 윤리를 제시하는 코덱스 디자인에 필요한 요인들을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인간적인 척도와 감각에 초점을 맞추는 인간적 요인, 그룹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상호작용 요인, 기본적인 요구이자 전제 조건인 디자인 요인, 본질에 대한 내용적 요인, 경제적 이득을 고려한 경제적 요인, 합리적인 환경 의식의 환경적 요인, 세계의 문화적 측면이 담긴 사회적 요인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동 지침을 실천함으로써 사회가 의식하게 만들고 의뢰인이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속한 시장은 선순환할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디자인은 그 자체에 시대의 경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따라서 이미 많은 부분이 표준화, 정형화되어버린 심미성에 앞서 사회문제에 대한 충분한 고찰과 인문학적 접근에 초점을 맞추어 디자이너의 역할을 재구성해야 한다. 디자인 속 철학의 부재는 전문 디자이너의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다. 사회적 움직임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철학을 가짐으로써 전문적인 디자인 영역을 지켜 나가자.
*프랭크 바그너의 ‘디자인의 가치 (The Value Of Design)’ (출판 : 안그라픽스)를 참고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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