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럽고 신비한 빛'이라는 뜻의 전라남도 영광(靈光)군, 이곳은 6.25 전쟁 당시 관내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한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그중에서도 서해 바닷가를 끼고 있는염산면의염산교회가 대표적이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기도처가 만들어지면서시작된염산교회는 6.25 당시 북한군에 의해전체성도의 ⅔가량인 77명의 성도들이 순교함으로 말미암아 한국 기독교 순교 사적지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 주변에는 당시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방호 목사 부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무덤, 그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 6.25 당시 불타 없어졌으나 다시 복원된 옛 예배당이 순교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은 물론 성지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염산교회로 가는 길
영광까지 직통으로 이어주는 고속/시외버스는 서울 및 수도권 일부 지역 외에는 없으며, 있더라도 하루 2~4회뿐이다. 따라서 광주까지 가는 고속/시외버스를 우선 이용하고, 다시 영광행 시외버스를탑승해야 한다.
이후 행선지가 염산면인 영광군 농어촌버스를 타고 염산면 공용터미널에 내려서 멀리 보이는 염산교회의 십자가를 따라가면 된다. 버스 시간대와 노선은 영광군 홈페이지를 참고하길 권장한다.
죽음을 무릅쓴 담대한 믿음과 예수 사랑의 실천
6.25 전쟁 당시 영광으로 진주한 북한군은 염산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지하교회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일제 못지않은 북한군의 탄압 속에서도 믿음의 불씨를 지켜나갔다.
이후 국군과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서울을 비롯한 38선 이남을 수복하면서 염산교회 교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환영 행사를 연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아직 영광에 남아있던 공산당이 믿음을 버리지 않은 이들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김방호 목사 일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피난 가기를 거부한 채 담대히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며 죽음을 맞이했고,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려는 이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심지어 우는 아이에게 '우리는 천국 간다'라고 안심시키기도했다. 이렇듯 염산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며 주 앞에 죽도록 충성한 것이다 ¹.
북한군과 공산당은 성도들을 학살하고 교회당을 없앴지만, 믿음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젓갈 항아리 속에 숨긴 성경책을 꺼낸 성도들은순교자김방호 목사의 차남인 김익 전도사와 함께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익 전도사의 태도였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 ²'는 말씀 그대로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 성도들도 학살한 공산당 세력들을 용서하며 믿음으로 품어주었던 것이다.즉, 악을 악으로 이기기보다는,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했던 것이다 ³.
염산교회를 나오며
염산교회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전체 성도 ⅔가 믿음 앞에 담대히 죽음의 길을 택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증오와 보복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택했다. 그것도 한창 전쟁 중이었던 시기에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경우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아들로 삼았던 손양원 목사가 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새 담임목사도 북한군의 학살에 의해 가족들을 잃었고, 북한군에 동조했던 세력들도 남아 있어서 언제든 갈등이 빚어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적들을 용서하고 복음을 전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염산교회의 김익 전도사를 비롯해 학살 속에서 살아남았던 성도들도 똑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믿음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이것이 염산교회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믿음의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