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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ak KIM Jun 01. 2023

낭만과 사랑 가득한 항도(港都), 목포 기독교성지

호남 기독교 선교의 구심점

군산과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인 개항장이라 할 수 있는 목포는 일제의 수탈기지로서 큰 아픔을 겪었으나, 호남 기독교 선교의 전진기지이자 구심점 역할을 맡은 곳이다. 1897년 개항과 함께 첫 발을 내디딘 유진 벨 선교사가 세운 양동교회, 아일랜드 천주교 사제들이 설립한 광주대교구와 산정동 성당, 그리고 36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배 만행을 속죄하고자 우리나라의 고아들을 사랑으로 품은 '목포의 어머니' 윤학자의 공생원이 모두 목포에 소재해 있다. 필자는 지난달 31일에 이곳들을 방문했다.

개항과 함께 눈물로 씨 뿌린 소금 같은 양동교회

필자는 지난 4년 전, 유달산 너머의 근대역사관을 비롯한 목포의 여러 명소들을 방문하기에 앞서 양동교회를 찾은 적이 있었다. 매주 일요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녔지만,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평범한 교회로만 여겼다. 그러나 유달산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이 교회가 일제강점기라는 격랑의 비극 속에서도 소금 같은 역할을 했던 곳임을 깨닫게 된 것은 이곳을 찾아올 때였다.

1897년 개항과 함께 유진 벨 선교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며 세운 '목포교회'로 시작한 양동교회는 1910년에 현 위치로 이전한 이래로 지금도 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더구나 유달산의 석재로 새 예배당을 지을 무렵, 도둑같이 찾아온 일본의 식민지배와 민족말살 정책이라는 거대한 폭풍에도 불구하고 3•1 운동 참여와 박연세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로 하여금 신앙과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하나의 소금으로써 맛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교회라 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준대성전(Basilica Minor), 가톨릭목포성지

양동교회를 떠나 언덕길을 올라가니, 바티칸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바로 1897년에 초기 광주•전남 천주교의 구심점 역할을 맡았고, 1933년에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의 파견으로 인해 광주대교구가 태동한 옛 교구청이 자리한 산정동 성당이다.

목포성지본당의 정식 명칭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지난 2021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곳이다. 즉 서울의 명동대성당보다 지위가 높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6.25 전쟁 당시 목포로 남하한 북한군에 의해 성당을 지켰던 3명의 사제와 2명의 신학생들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아픔을 겪었는데, 앞서 언급한 성직자 외에도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 안타깝게 희생된 많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20년에 이 성당을 새로 지었다.

이뿐만 아니라 산정동 성당은 '레지오마리애'라는 이름의 천주교의 평신도 봉사단체가 첫 도입된 발상지이기도 한 곳이다. 아직 전쟁의 아픔이 가시지 않았던 1953년에 2개의 기초 조직인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첫 주회를 연 것으로 시작된 한국 레지오마리애는 현재 3개(서울, 광주, 대구)의 세나뚜스 휘하에 무려 53만 명에 달하는 단원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광주대교구의 역사전시관으로 활용 중에 있는 옛 광주교구청 건물에는 첫 주회를 재현한 모습을 비롯하여 한국 레지오마리애에 대한 모든 것을 전시 중이므로 한 번씩 찾아가 보길 추천한다.

(목포성지 역사박물관의 관람시간은 화~일요일 10:00-17:00, 월요일 휴관)

국경을 넘어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 공생원

'영원히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을 존재의 목적으로 하는 곳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목포가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인 공생원이다.

1928년, 앞서 언급된 양동교회의 전도사 윤치호가 어린 고아 7명을 데리고 함께 생활했던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그가 키운 아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홀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당시 여학교의 음악교사로 부임했던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가 합류하여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결혼하여 고아들을 돌본다.

그러나 해방 이후와 6.25 당시 갖은 고초를 겪고, 남편인 윤치호가 행방불명되는 아픔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학자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를 입은 아이들 3천여 명을 사랑으로 키워낸다. 그녀의 집안이 일본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 집안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윤학자 여사는 1968년 별세했으나, 그녀 밑에서 자란 네 명의 자녀들은 어머니를 따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공생원에는 설립 초기에 아동숙사로 사용했던 윤치호•윤학자기념관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윤치호 원장이 난파선으로 지었던 강당과 함께 대반동의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건립한 2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진심과 사랑을 짐작케 한다.

- 찾아오는 방법 -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온 경우에는 도보로 불종대까지 걸어가서 우회전하면 양동교회와 산정동 성지를 찾을 수 있다. 도보로 20분이 소요된다.

고속버스를 타고 온 경우는 터미널 앞 정류장에서 시내버스 1번을 타고 목포역 앞에서 하차해 목포역에서 내린 경우와 동일하게 도보로 이동하면 된다.

•공생원의 경우, 기차든 고속버스든 상관없이 시내버스 1번을 타고 공생원 앞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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