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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Sep 28. 2021

국제도서전이 뭐라고 5

『감처럼 무르익고 싶어』

 

오랜만에 지인과 통화하면 근황 토크에 책 출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심도 깊은 질문을 받게 된다. 책이 어떻게 나왔는지부터 왜 ISBN이 없어서 검색이 안되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지금의 심경이 어떠한지 등. 공식적인 저자 인터뷰는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 어린 질문에 생각하고 말하다 보면 내면이 조금씩 정리된다.


 아직 감정과 생각이 정리중이여서 어버버 버퍼링 중인 나를 동네 언니들은 수용해준다. 어쩌다 한바탕 웃으면 묘한 긴장의 끈이 풀리고 만다. 얽히고설킨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너여서 글을 쓰는 거라고, 고맙게도 수용을 넘어서 용기를 준다.


“그래서 넌 책에 만족해?”     


순간 눈이 반짝했다. 이 질문 앞에 나도 모르게 힘주어서 말했다.     


“만족해. 내가 담을 수 있는 그 이상을 담았어.”     


 그것이 어떤 논리적인 근거를 두고 말할 수 있는지 또다시 설명할 길은 없다. 누가 뭐래도 책이 마음에 쏙 들었다. 비록 샅샅이 퇴고해도 오탈자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쉽기보다는 만족스러웠다. 책이 나온 이후의 감정이 처음이라서 혼란스러웠을 뿐, 정직하게 쓰려고 했던 이야기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기억의 망각으로 덮어둘 수 있었던, 하지만 들추어졌던 이야기는 내가 담을 수 있었던 만큼의 애쓴 결과물이었다. 마침내 스스로 만족스러우면 그만이지. 동네 언니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책과 내가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허기가 질 때 도서관을 간다.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길 때 도서관을 간다. 한동안 활자가 무겁게 느껴졌다. 도서관에 꽂힌 책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걸까. 얼마나 많은 삶이 담긴 걸까. 책을 읽으며 애써 생각하고 애써 빠져들기에는 나에겐 저장된 에너지가 없다. 난 정말 대단해, 라고 말하는 책보다 네 마음 알아줄게, 라고 말해주는 책에서 숨이 쉬어졌다. 책마다 역할이 다르고, 때가 다르고, 의미가 다르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람이 사람으로 치유가 되듯, 글은 글로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새어나간 글만큼 책에서 주는 글의 감동이 조금씩 차오른다. 특히 시가 내려쓴 짧은 호흡에서 찰랑찰랑 활자의 온기가 데워진다. 시인의 언어가 끌어당기고 달라붙었다. 캄캄한 동굴 속에 웅크렸던 나에게, 쉬지 않는 흐르는 냇물처럼 시끄러웠던 나에게 시가 내 마음을 풀어주는 열쇠처럼 마음을 풀어주었다. 솔직하고 우아하고 거침없는 시의 세상은 짧고 정직하고 강렬하다. 마음을 비우니 시가 보인다.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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