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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Oct 08. 2021

아찔한 자라섬

가족의 동상이몽


 아빠에게 연락을 드렸다. 아빠는 주말에 엄마랑 자라섬에 다녀오셨다고 하셨다. 가을꽃 축제가 열려서 꽃밭이 끝도 없다고, 종류가 하도 많아서 셀 수 없다고 하셨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가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셨다는 얘기를 흥분해서 들려주셨다. 아빠와 전화를 끊고 재빨리 엄마에게 연락을 드렸다. 엄마는 자라섬에서 배가 너무 고팠다고, 속이 애릴 정도였다고 했다. 마땅히 먹을 데가 없기도 했지만 집에서 밥 먹자는 아빠 때문에 엄마는 쫄쫄 굶은 채로 경춘선을 타고 집으로 오셨다. 엄마는 아빠랑 다신 안 다니고 싶다고 하셨다.

  

 동상이몽을 멀리 찾을 필요가 없다. 누구의 말이 진짜일까. 자라섬이 궁금해졌다. 일주일 안으로 꽃이 질 거라는 두 분의 유일한 공통된 말씀은 자라섬의 마법이 곧 풀린다는 예고 같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흐렸어도 우리 가족은 당장 그곳을 가기로 했다. 사 먹을 데가 없다는 걸 대비하여 고구마와 포도, 컵라면을 챙겼다. 대용량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았다. 만반의 준비는 끝났다.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될 거 같아 눈에 보이는 작은 돗자리와 나무젓가락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

  

 처음으로 가보는 자라섬. 아빠는 좋았고, 엄마는 힘들었다는 자라섬. 우리 가족은 어떤 추억으로 기억될까.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가평에 있는 자라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괜찮다. 나는 우비도 있고, 우산도 있다. 비를 대비하여 슬리퍼도 신고 왔다. 배고픈 우리는 꽃 정원에 입장하기 전에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아이들은 꽃구경보다 야외에서 컵라면을 먹는 데 신이났다.


 주차한 차와 몇 걸음 떨어진 넓은 잔디밭에 작은 돗자리를 폈다. 트렁크에서 뜨거운 물을 컵라면 용기에 하나씩 담았다. 남편이 라면을 들고 가서 아이들이 앉아있는 돗자리로 옮겼다. 마지막 물을 붓고 컵라면을 가져가려는 찰나, 돌발상황이 일어났다. 먼저 두었던 컵라면 사발이 엎어져버린 것이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비는 내리고, 돗자리에 구불구불한 면과 빨간 국물이 쏟아져 있고, 둘째 귀요미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첫째인 기쁨이는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만 왜 컵라면이 엎어졌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진 못했다. 푹신한 잔디 때문인지, 돗자리의 주름 때문인지, 아이가 일어서다가 움푹 들어간 바닥에 컵라면의 중심이 기울어진 건지. 사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고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버린다. 남편은 안타까워 탄식하기 시작했다. 귀요미는 낑낑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나의 이성회로는 침착하게 아이부터 살폈다.


 귀요미를 살펴보니 바지 엉덩이 쪽이 흠뻑 젖어 있다. 뜨거운 물에 엉덩이가 데인 것이다. 엄청 뜨거웠던 물이 팬티선에 고였는지 자국이 나있다. 빗방울이 세지는 만큼 귀요미의 눈물이 터졌다.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송아지처럼 엉덩이가 뜨겁다고 아이는 울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귀요미였다. 보들보들한 엉덩이가 화끈화끈 새빨개졌다. 아주 살짝 물집이 잡혔을 정도였다. 하필 성능이 우수한 코끼리 보온병이라니. 일단 바지를 벗겨 남편이 찬물에 젖은 손수건으로 엉덩이를 닦아주고 윗옷으로 허리를 둘러서 엉덩이를 가려주었다.


 귀요미는 훌쩍거리면서도 눈은 컵라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불은 라면을 끝까지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 상태로는 꽃 정원에 들어갈 수 없다. 갈아입을 바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말로만 듣던 자라섬에서 불은 라면만 딱 먹고 집으로 향했다. 세상에는 예측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법이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그곳을 떠나며 남편과 나는 아쉬운 맘은 어쩔 수 없었지만 기쁨이와 귀요미는 라면이 불어도 맛있었다고 했다. 동상이몽. 집에 가는 길은 대단히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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