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단에 위치한 도봉산에는 무수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무수골은 세종의 17번째 아들인 영해군 묘가 조성된 곳으로 500년 넘게 그의 후손들이 간직해온 땅이다. 무수골에는 흔한 편의점도 없고, 카페도 없다. 도시지만 시골 같은 고즈넉한 논밭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북한산국립공원 안에 있어서 도시 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햇볕이 뜨거워지고, 산등성이를 타고 온 바람이 잎사귀와 춤추는 봄날, 무수골을 사랑하는 이웃들이 논밭에 모였다. 모내기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농부의 88번의 손길에 걸쳐서 쌀을 얻는다고 한다. 좋은 볍씨(왕겨)를 골라 볍씨를 발아시키고, 못자리한 모판에 심는다. 30일의 시간이 지나면 연두색 잎이었던 새싹들이 초록 물결을 이룬다. 논에 모를 심어야 할 시기가 이르렀다.무수골 논밭의 주인인 어르신은 이앙기로 모를 척척 심으셨다. 기계로 전부 심을 수 있지만 무수골 생태를 아끼는 C선생님은 어르신에게 논밭의 일부분을 대여했다. 전통 손 모내기를 하면서 자연을 만지고 배우고 싶은 어린 농부들을 위한 마음이었다. 무수골 무지개 논밭에서 2011년부터 지금까지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 베기 행사를 했다. 12년 동안 이어진 행사에 올해에는 35명의 초등학생, 20명의 어른들이 달뜬 얼굴로 모여들었다.
“논하면 생각나는 게 무엇인가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번쩍번쩍 손을 들고 제비처럼 대답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요!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일하는 거 봤어요.” “쌀의 집이요. 쌀이 모여 살아요.” “농부의 노력이요.” “논은 개구리 마을이에요.” 아이들은 저마다 독창적인 대답을 한다.
선생님은 벼농사의 역사를 먼저 들려주셨다. 벼농사는 한반도에서 1만~1만 5천 년 정도 유래되었다고 추측하고 있고, 논은 물을 가둬 만든 습지라고 하였다. 바다에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처럼 건강한 습지에는 200여 종의 생물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원앙, 오리, 물방개, 소금쟁이, 우렁이, 개구리, 메뚜기 등 사람만을 위한 땅이 아니라고 하셨다. 밀 농사가 주요 농사인 나라는 밀밭은 물을 내보내기 때문에 생물이 함께 살 수 없어서 사막화가 되기 쉽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조상들이 벼농사를 한 덕분에 우리가 쌀을 먹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생물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삶의 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자 한 아이는 “제 옷에 곤충이 붙었는데 죽일 수가 없어요!”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이제 본격적인 모내기 시간. 모판에 있던 모를 뭉텅이로 잘라 논밭에 군데군데 던져 놓았다. 아이들은 일렬로 서기 위해 논밭으로 발을 내디뎠다. 논이 습지라 발이 쑥 빠졌지만 그리 깊지 않았다. 진흙 속에 빠진 맨발과 종아리가 시원해서 그런지 한낮의 더위가 가시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모 다섯 포기를 손으로 뜯어서 뿌리가 흙 속에 너무 깊지 않게, 또 물에 둥둥 뜨는 뜬 모가 생기지 않도록 잘 심어야 한다고 하셨다. 논밭 끝에서 끝으로 못줄을 길게 늘어뜨려 잡고 있으면 15cm마다 떨어진 빨간색 표시에 맞춰 모를 심으면 되었다. 모가 일렬로 심기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나는 눈으로 보고, 모를 만지고, 귀로 들으면서 그동안의 궁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자리를 잡았다. “심으세요!”라는 구호에 맞춰서 아이들은 흙이 묻은 작은 손으로 모를 심었다. “한 칸 뒤로!”라는 구령에 맞춰 아이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모를 심었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꽤 오랫동안 했지만 아이들은 힘들기보다는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줄이 삐뚤빼뚤하고 심긴 모의 정도가 제각각 달랐지만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점점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참개구리, 청개구리가 놀라서 튀어 다닐 때마다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우렁이가 보이면 인사를 했다. 아이들에게는 노동이 아닌 놀이였다.
온몸에 흙이 묻을수록 아이들은 신나 보였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바닥에 안겨진 아이들은 아무도 다치지도 않았고, 누구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모내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무수골 냇가에서 진흙으로 얼룩진 다리를 닦아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은 손바닥에 물을 담아 친구들에게 끼얹었다.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말갛고 싱그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