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부터 비행기로 약 16시간, 그 후 또 버스로 3시간 가량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끝으로 도착한 다트머스 캠퍼스에서 나를 처음 반겨준 것은 알록달록 이상한 머리 색깔을 하고, 말도 안되는 옷을 차려입은 선배들이었다.
(알록달록 하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선배들은 Dartmouth Outing Club (DOC)이 위치한 로빈슨 홀(Robinson Hall) 앞에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싱글벙글 웃으며 춤을 추거나,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우리를 맞아주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동화되서 같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신기해하며 구경하는 사람들, 나와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신입생들이 모여있었다. 알고보니 그 선배들은 H-Croo (Hanover Crew)로, DOC 트립 기간 내내 해노버에 머물며 해노버에 처음 도착하는 신입생들을 환영해주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퍼실리테이터였다. 정신나간 요정처럼 차려입은 H-Croo 선배는 아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낯설어하는 나를 적극적으로 리드하며 다트머스의 전통 춤인 솔티 덕 래그 (Salty Dog Rag)의 스텝을 가르쳐 줬다. 그렇게 계속 꼬이는 스텝을 열심히 연습하고, 주변 친구들의 이름을 익혀가며 나의 DOC 트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DOC 트립이란 매년 첫 학기 시작 전 신입생들이 다 같이 떠나는 4박 5일 간의 야생 여행으로, 다트머스만의 독특한 오리엔테이션이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애팔래치안 산맥 위에 위치한 다트머스는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DOC 트립은 이 장점을 살려 신입생들을 강제로 핸드폰도 안 터지는 푸른 자연 속에 밀어넣고 하루종일 서로 시간을 보내게 함으로써 빨리 친해지게 하는 일종의 극딜을 시전한다. 보통 상급생 트립 리더 2명과 신입생 6~10명 정도가 한 팀을 이루어 여행하게 되는데, 재밌는 점은 5일 내내 샤워는 커녕 세수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야생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냄새나고 꼬질꼬질해진 꾸밈없는 모습으로 대학에서의 첫 친구들을 만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DOC 트립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기본인 하이킹은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 4개 레벨로 나뉘어 있고, 그밖에도 카누, 카약, 낚시, 요가, 승마, 산악자전거, 유기농 농업체험, 풍경사진 촬영, 풍경화 그리기, 글짓기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서 신입생들은 캠퍼스 도착 전에 미리 각자 원하는 트립을 골라 신청할 수 있다. 신청은 1지망부터 3지망까지 할 수 있는데 카누, 카약 등의 워터 스포츠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 운이 좋아야 당첨될 수 있다. 반면 하이킹은 듣기만 해도 고생의 아우라가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제공되는 횟수가 많아서인지 별로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래서 초급 하이킹 그룹에는 종종 그 트립을 1지망으로 고른 사람이 단 한명도 없고, 다들 3지망에 쓸 게 없어서 적었다가 울며 겨자먹기로 배정받은 사람들만 모이게 되기도 한다.
나에게 DOC Trip은 다트머스에 대한 첫인상이기도 했지만 미국에 대한 첫인상이기도 했다. 우선 트립에서 난생 처음 미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내가 1지망으로 신청해서 배정받았던 카약은 사실 그 이름도 낯설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새로운 스포츠였는데, 카약을 타고 다트머스 캠퍼스 서쪽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코네티컷강을 쭉 따라 약 32마일을 노 저어 가는 여행이었다.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물빛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열심히 노를 저으며 가다가도 문득 ‘이게 현실이 맞나.’ 싶어 멍하니 상념에 잠기곤 했다. 저녁에는 불빛 하나 없는 컴컴한 숲속에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만들었는데 밤이 되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웠지만 피곤해서였는지 침낭 안에만 들어가면 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여행하는 동안 낯설기만 했던 야생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배 방향을 조정하는 요령도 생겼고, 커다란 침낭을 말도 안 되게 작은 가방에 누르고 눌러 야무지게 쑤욱 집어넣는 법도 터득했다. 무엇보다 습기 때문에 눅눅해진 베이글과 피타도 달콤한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듬뿍 발라 먹으면 배 위에서 간단하게 주린 배를 채우기에 그만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자연이랑 친해지는 것도 좋지만 신입생끼리 빨리 친해지는 것이 오리엔테이션의 진짜 목적인데 여행이 거의 끝날 때까지도 나는 친구들이 너무 어색하기만 했다. 물론,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아직 편하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라온 미국 아이들이 하는 대화에 내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 사이엔 내가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다. 어떤 때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냥 관객이 되어 10대 아이들이 나오는 미국 하이틴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워낙 활발한 성격이라 미국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에게 DOC 트립은 큰 충격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점점 평소 성격과는 달리 조용한 아이가 되어갔다. 계속 주눅이 들어가던 나는 여행 3일차에 한가지 결심을 했다. 관객모드에서 벗어나 영화 속 인물이 되어보자고 말이다. 마침 강 한가운데 있는 높은 다리에서 다이빙을 할 기회가 생겼다. 평소같으면 하지 않았겠지만 왠지 이걸 꼭 해내야 앞으로의 미국 생활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눈을 꼭 감고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뛰어내렸다. 몇 초 간의 정적이 흐르고……. “찰싹” 차디찬 강물 표면에 부딪혔을 때는 온몸이 따끔따끔 아팠지만 몸도 마음도 진짜 끝내주게 시원했다.
DOC 트립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바로 넷째 날, 무스락(Moosilauke)에서의 저녁 식사였다. 소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트립을 떠났던 모든 신입생과 트립 리더들은 마지막 날, 무스락이라는 거대한 산장에 모여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이 때, 로지 크루로 일하는 상급생들이 정성들여 준비한 따뜻한 저녁을 나눠 먹는데, 메뉴는 다트머스의 동문이자 미국의 유명한 동화 작가인 닥터 수스 (Dr. Seuss)의 책 <초록색 달걀과 햄>에서 모티브를 얻은 초록색 달걀과 햄이다. 좁은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식욕 떨어지는 색의 달걀을 먹으면서 나는 문득, ‘정말 모두가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환영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어쩐지 초록색이 조금 더 정겹게 느껴졌다.
비록 나에게는 즐겁기도, 힘들기도 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다트머스에서 신입생을 위한 DOC 트립을 준비하는데 기울이는 노력은 정말 감동적일 정도이다. 우선 이 거대한 행사를 치뤄내기 위해 매년 400명 이상의 상급생이 자원해 참여한다. 그 중 약 2/3 이상을 차지하는 트립 리더들은 응급 상황 시 대처법을 비롯한 각종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소중한 여름방학까지 대부분 반납하고 깡촌 해노버로 돌아와 공부를 한다. 신입생들이야 트립을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대자연에 풀어놓은 망아지(?)들의 안전을 책임져야하는 트립 리더들은 사고 없이 즐거운 트립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고군분투한다. 이렇게 빡세기만 하고 특별한 보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트립 리더와 H-Croo는 모두 선발 과정의 경쟁률이 굉장히 높고, 지원자들의 열의가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신입생을 받는 가장 다트머스다운 방법인 DOC 트립은, 그래서 어쩌면 다트머스 학생들이 유독 애교심이 높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와 후배들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선배들에게 직접 물려받았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