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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서 질서가 자랄 때 - 핀업걸, 머메이드

폴댄스 에세이 「폴 타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by 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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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날 아침 갑자기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선생님들이 다 몸살이 나서 수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폴댄스는 선생님이 직접 시연을 해야되기 때문에 선생님의 컨디션도 중요한 운동이다.


사실 마침 수업을 예약한 날 같은 시간대에 지인들의 출판기념회가 있는 날이었다. 폴댄스 수업도 듣고 싶고, 출판기념회도 가고 싶었지만, 이미 폴댄스의 매력에 퐁당 빠져버린 나는 폴 수업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폴 수업이 취소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모임에 다녀오기로 했다.


수년간 매일 아픈 동생과 호수공원 산책을 하던 경호는 산책하며 쓴 에세이를 엮어 『그리고 세수를 아주 열심히 합니다』라는 에세이로 공모전에 응모해 공저자로 책을 냈다. 수연은 고양이를 키우는 우울증 환자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엮어 『고양이 처방전』이라는 책을 냈다. 삶도 포기하지 않고 글도 포기 하지 않아 결국 책을 낸 멋진 두 명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날이다.


“저는 정말 끈질기게 글을 썼던 거 같아요.” 수연이 한 말 중에 ‘끈질기게’라는 표현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끈질기게’라는 말. 오늘 출판기념회의 주인공들과도 어울리는 표현이지만, 폴과도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재밌고 희안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기분이 엄청 좋았던 모양이다. 뒤풀이까지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한 지인이 날 보며 말했다.

“많이 좋아졌네.”


나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심한 산후우울증에 앓았었다. 자살 할 용기는 없어 매일 그냥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과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기를 수개월이다. 그 때 유일하게 내게 탈출구라고 할 것은 한숨처럼 뱉었던 글뿐이었다. 일과 육아 때문에 어디 나가는 것이 큰 맘 먹고 해야 할 일이었지만, 운동을 해야만 해서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회사 체력단련실을 매일 드나들었다.


우울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울증을 유발하는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해서 이사도 가고 육아도 남편이 더 전담하게 되고, 한발 떼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 식단과 운동이라는 한 발을 겨우 뗄 수 있었다.


건강한 정신도 건강한 몸도 없는 저 둘이 어쩜 저렇게 치열하게 글을 써서 책까지 낼 수 있었을까.

옆자리에 앉은 지인이 물었다.


“요즘엔 왜 글 안 써요? 글 써요.”

“요즘에 글이 써지지 않아요. 글재주가 없기도 하고요.”

“서영씨는 글을 써야 해요.”


“저 요즘 폴댄스 배우거든요. 폴댄스 이야기를 글로 써볼까요. 오늘 출간하신 분들 이야기를 듣다가 결심했어요. 폴은 감정에 크게 좌지우지 되는 운동이에요. 주변에서도 응원해주면, 더 힘 있게 올라갈 수 있어요.”

살면서 이토록 사람들에게 내세우고 싶은 자랑거리는 없었다. 세 번 밖에 올라가보지도 않은 폴에 대한 소회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마치 어렵게 딴 졸업장처럼 유난을 떨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주책바가지다.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폴이 꼭 내 인생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빠르게 돌아가는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을 몰라 멈추어 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운동을 하면서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이를테면 폴댄스 일기.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폴을 통해 직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악착같이 폴을 타고 싶어진 것 같다. 기술을 배우자. 얼마나 어렵고 아픈 동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죽지 않고 삶 위에서 춤을 추고 싶다.


과음한 다음날, 출근하는 통근버스에서 속이 울렁거렸다. 술꾼의 항변 같아서 이렇게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도 이렇게 과음할 줄 몰랐던지라’ 오늘 퇴근 후 폴수업을 예약했는데 큰일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폴댄스 수업에 가기로 한다. 속이 계속 불편해 점심식사도 거르고, 퇴근시간이 지나고 폴수업을 가는 와중에도 계속 속이 울렁거려 수업 취소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였지만, 끈질기게 폴을 타보자고 다짐한지 불과 24시간도 안 지난게 또 오기가 생겨 결국 학원을 가고야 만다. 폴 타면 어지러운데 이러다 또 말리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슬픈 예감은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내가 받은 수업 중 폴 위를 가장 높이 오른 날이자, 폴이 가장 어지러운 날이었다. 막상 영상으로 담긴 내 폴 타는 모습은 그리 높게 올라가지는 않아 보였지만 체감으로는 그랬다. 오늘은 ‘핀업걸’이라는 동작을 배웠다. 핀업걸은 말 그대로 핀업걸의 시그니처 포즈를 닮았는데 발끝을 포인하여 일자로 뻗은 예쁜 다리 선을 강조하는 동작이다. 폴을 오른손 높이 왼손 가슴 높이에서 브라켓 그립으로 잡아준다. 다리를 쭉 펴서 양쪽 아킬레스건을 폴에 닿도록 대준다. 그 후 머메이드라는 동작을 이었다. 두 다리를 접으며 회전한다. 다리를 접을 때는 무릎 붙이고 발도 붙도록 해준다. 인어공주처럼 인어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꾸 무릎이 벌어지고 다리도 벌어지려 하는데 그래서 떼지지 말라고 머메이드라고 부르나보다. 폴을 잡고 있는 오른팔도 아프고 어지럽고 다리 붙이는 것도 어려워서 몸이 달달 떨렸다.


“바닥에 바퀴벌레 2천 마리 있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표정 우아하게!”


선생님이 말했다. 바닥에 수천 마리의 바퀴벌레가 있어서 무섭지만, 핀업걸 처럼 깜찍하고 섹시하게 인어공주처럼 우아하게, 더 버텨보자! 아프지만 아랫입술을 깨물며 참아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동작을 연습하다가 너무 어지러워서 폴에서 내려온 후 바닥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폴 위가 원래 어지러운 건지 숙취로 어지러운 건지 분간 할 수 가 없었다.


“선생님, 갑자기 폴이 빨리 도는데 이유가 뭔가요?”

“폴에 몸을 가까이 댈수록 폴은 빨리 돌아요. 그리고 처음에는 힘 조절을 못 해서 갑자기 힘을 주면 폴은 더 빨리 돌아요. 동작을 천천히 힘을 조절하면서 차분하게 타야 해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천천히 동작을 시도해보았지만 폴은 여전히 빨리 돌았다. 그리고 어지러워 자꾸 폴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힘 조절을 터득하는 것. 지금의 내 삶과 비슷했다. 일과 육아. 폴에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지만 끝까지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버티고 단련한 시간은 내 인생에 결코 후회하지 않을, 멋진 공연 하나가 되어있을 것이다. 언젠가 멋진 폴 복을 입고 멋지게 폴 프로필도 찍고 싶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가 벽에 걸린 시를 발견했다.

최병호의 「면面에서 자라는 것들」이라는 시다.

“혼돈에서 질서가 자랄 때/노래가 시작됐는지 모른다”


나는 이 구절이 폴댄스를 설명하는데 적절한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폴 위에서 동작 하나 해내기에 버거웠던 지난 폴댄스 수업. 그러나 어지러운 폴 위에서 서툴지만 동작 하나하나를 이어 붙인다. 그렇게 겨를 없이 춤이 춤인줄도 모르고 춤이 시작 되었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인지 모르고. 행복이 행복인지 모르고. 얼마나 실수를 했든, 얼마나 어지럽던, 얼마나 서툴던 그렇게 겨를 없이 춤이 되었다.


어지러워서 어렵다. 어려워서 어지럽다. 유독 폴을 타는 것이 어지러운 오늘, 수업이 끝나고 찍은 영상을 다시 보는데 아직도 폴 위에서 계속 도는 것 처럼 어지러웠다. 다리를 더 접을 걸, 발끝 포인 좀 신경쓸 걸. 오늘도 역시 내 동작에 아쉬움이 크다. ‘역시 술 마신 다음 날 폴수업은 신청하는 게 아니구나.’ 자연히 이런 결론까지 이르렀다.


다음날 아침, 몸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향했다. 건강관리를 시작한 후 2주에 한번 인바디를 잰다. 마침 2주차가 되어 몸을 풀고 운동하기 전 인바디를 쟀다. 근육 증가. 0.6kg 증가! 근육 1kg에 1,300만원이라고 하니 돈으로 환산하면 780만원을 벌었다. 누군가에겐 0.6kg 작고 귀여운 무게겠지만, 내겐 다르다. 세 달 동안 매일 혼자 운동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근육은 겨우 0.1kg 소폭 늘며 잘 붙지 않던 근육이 폴댄스 수업 4회차만에 6배로 증가했다. 저녁모임에 갔다온 이후로 몸무게가 자꾸 늘어 요요가 왔다고 자책하던 나는, 그것이 지방이 아닌 근육이라는 사실에 기뻤다. 근육도 붙고 자신감도 붙고 인생의 작은 목표도 생겼다. 폴 좀 못 타면 어떤가. 당장 내 몸에 근육이 붙었는데!


폴댄스 인스타그램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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