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배뚱뚱이
안녕하세요 배뚱뚱이입니다. 일상건강을 운영하는 한독이 올해로 창립 70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70년 전이면 1954년인데요. 오늘은 과연 1954년의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어땠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6.25가 끝난 1년 후, 병원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1954년 당시 의과대학, 7+1개
1954년 우리나라에는 8개의 의과대학이 존재했습니다. 서울에는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당시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연희대학교와 별도 존재), 이화여자대학교, 서울여자의과대학, 가톨릭대학교가 있었는데 이 중에 가톨릭대학교 (당시에는 성신대학) 의대를 설립한 해가 바로 1954년입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1899년 당시 국가에서 만든 의학교를 그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 교장이 종두법으로 유명하신 지석영 선생님이십니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변경되었다가 1916년에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으로 변경되고 1945년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1886년 설립한 제중원 의학교를 그 효시로 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의과대학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화의대는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병원을 일제강점기 때부터 운영을 하고 있었으나, 의학과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에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여자의과대학? 여러분께 다소 생소하실 수 있겠지만, 이 서울여자의과대학은 1928년에 만든 조선여자의학강습소에서 시작한 의학교육기관입니다.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이라는 미국출신 선교사이자 여자 의사가 만든 학교로, 여성들이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이지 않아 의료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보고 만든 학교입니다. 지금의 명륜동 아남아파트 자리가 서울여자의과대학 및 혜화병원자리라고 합니다. 이 학교는 1957년 수도의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 후, 재단 이사장인 우석 김종익 선생의 호를 따 1966년 우석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합니다. 그러나 이사장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인해서 1971년 고려대학교에 흡수합병되어, 서울여자의과대학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진다고 보실 수 있겠습니다. 1954년 당시에는 지금의 대학로라 불리는 혜화동에 서울대 전체 캠퍼스가 있었고, 서울여자의과대학, 성균관대학교까지, 정말 대학로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경북에는 1923년 개교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전남에는 1944년 개교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이 있었는데 두 대학 모두 기존의 도립의과대학 체제에서 1952년에 지금의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경북대 의과대학은 수도권 외에는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며,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삼덕동의 의대 본관 건물은 역사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입니다. 부산대학교에도 의대가 있었지만 아직 의과대학 본과 과정이 시작 전인 의예과 학생들만 1953년에 선발하여 1955년에 본격적으로 의과대학이 개설되게 됩니다. 그래서 7+1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당시 북한에는 평양의학대학과 함흥의학대학 2개의 의학대학이 있었으며, 모두 일제강점기에 개교하였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대형 병원들은 어디에?
위의 의과대학 중에 1954년에 있던 위치에 그대로 있는 병원은 서울대학교와 경북대학교, 그리고 전남대학교병원입니다. 모두 현재의 국립대학교 병원이라는 특징이 있네요. 서울대학교 병원의 높은 하얀색 건물이 바로 1978년에 완공된 서울대학교 병원 본관입니다. 제가 의사가 되어보니, 이 병원에는 왠지 의학 지식의 끝판왕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위압감을 느끼곤 한답니다.
1978년에 지은 병원이다 보니 병원 공간은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대 공사 끝에 추가된 건물이 바로 ‘대한외래’라고 하는 지하 외래 공간인데요. 그 공간 앞에는 매우 고풍스러운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위 사진의 건물이 바로 대한의원 터입니다. 1905년에 이전하여 설립된 건물입니다.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모두 제중원을 의과대학의 뿌리로 여기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1890년대 후반부터 세브란스 병원이 독립해 나가는 1904년까지 조선 정부는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제중원을 계승하는 병원은 세브란스병원이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954년에는 이 세브란스 병원이 서울역 근처, 지금의 세브란스재단빌딩 자리에 있었습니다. 방금 위에 언급드린 1904년에 이전한 위치가 바로 세브란스 병원의 자리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은 1962년에 신촌에 있는 지금의 병원 자리로 이전하여 현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좌측의 파란 유리와 하얀 천장의 건물이 세브란스병원 자리입니다.
성모병원 또한 1954년 당시에는 명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명동성당 왼쪽에 보이는 신식 건물이, 최초 명동성모병원 건물입니다. 지금은 가톨릭회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병원은 대학이 생기기 이전인 1936년부터 개원하였고, 무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1831-1931)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네요. 1974년에 여의도로 이전할 때까지, 이곳이 가톨릭대학교의 모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이화의대병원 또한 지금의 목동과 마곡이 아닌, 원래 동대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튼이 이화학당과 함께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여성병원을 세웠고 이 보구녀관의 동대문분원 자리가 이대동대문병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병원 건물의 일부는 한양도성박물관으로 재활용(?)되어 있습니다.
1954년 우리나라의 의사 수, 5899명
보건복지부 2023 보건복지통계연보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의사 숫자는(한의사 제외) 134,953명입니다. 그렇다면 70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의사 숫자는 5,899명이었다고 합니다. 1955년 기준 총인구가 2,150만 정도, 지금의 40%라고 봤을 때, 의사 숫자는 지금의 5%도 채 안 되는 수준이었네요. 특히 이 당시에는, 지금의 북한지역에서 교육을 받은 (평양의전, 함흥의전) 출신의 의사의 면허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의료계 내에서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9년 전 (1945) 까지만 해도 하나의 나라였기에 지금의 우리가 북한 출신의사를 보는 시점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다른 면허의료인력의 통계도 볼까요? 치과 의사는 전국에 938명, 한의사는 1,998명 놀라운 것은 간호사는 2,251명이고 약사는 1,499명으로 의사 숫자가 간호사 숫자의 2배가 넘고 약사 숫자의 3배가 넘는 수치였습니다. 아무래도 직역에 대한 분업과 교육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다 보니 일어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1971년에 간호사 숫자가 의사 숫자를 뛰어넘게 되고, 1973년에 약사 숫자가 의사 숫자를 넘게 됩니다. 현재 면허 간호사 수는 480,925명이고 약사 수는 75,461명입니다.
우리나라 의학 교육의 전환점 미네소타프로젝트
1954년은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해입니다. 바로 서울대와 미국 미네소타 주 정부 간에 체결된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시작된 해입니다. 우리나라 의과대학뿐만 아니라 서울대 농대, 공대의 교수들이 미국의 지원으로 미네소타 대학 (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연수를 받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총 62분의 의과대학 교수가 연수로 방문하였고, 대부분의 교수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단순히 미국에서 선진 의학을 배워온 것을 넘어서서, 철저히 일본을 통해 일본화된 의학만을 배웠던 우리나라의 의학이 직접 미국의 선진 의학을 바로 배우는, 의학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의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홍창의 소아과학”의 홍창의 교수님 또한 미네소타 대학에서 수학하셨고, 국내에서 최초로 개흉 심장수술을 성공하신 (1963년) 이영균 교수님도 이때 미네소타에서 수학하셨습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때는 불가능했던 것들
여러분들, 간이식, 신장이식 이런 이식 수술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폐, 심장까지도 이식할 수 있는 장기에 포함되는데 최초의 장기 이식은 1954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이식에 따른 면역 거부를 피하기 위해서 일란성쌍생아 간의 신장이식이 처음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장이식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1969년 3월 25일 명동성모병원에서 시행됩니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파괴된 그런 국가에서 15년 만에 이식수술 기술을 따라잡았던 것이지요. 당연히 다른 장기의 이식이나 조혈모세포이식 같은 의료행위는 1954년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불가능했었습니다.
항암치료도 1950년대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항암제라는 약물 자체가 애당초 화학무기로 개발된 질소머스터드 (nitrogen mustard)를 그 시초로 보는데 그것이 1940년대 초반에 처음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900년대 초반부터 있었던 방사선 치료에 비해서 역사가 짧은 것이 특이하네요. 1930년부터 방사성동위원소(라듐)를 이용한 암 치료를 시행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의외로 그 당시 가능했던 의료행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출산 시 시행하는 제왕절개수술입니다.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1909년에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처음 시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70년간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의료환경
70년이라면 엄청나게 긴 시간 같지만, 실제로 제가 병원에서 치료하는 환자들의 반 이상은 1954년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태어나셨을 때는 없었던 발전들로 죽을 병을 넘기고 암을 이겨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55~1960년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이 51.23세였으나 1970년 62.3세를 넘어 2022년 현재는 82.7세로 1954년과 비교한다면 30세를 더 살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다 먹고살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모여, 의료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이루어진 70년간의 발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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